이산(正祖)의 시– 망묘루(望廟樓)에서 재숙(齋宿)하면서 (홍재전서5권시1) & 최승로의 시무28조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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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 禋柴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리다

○ 6월. 제서를 내리기를,

“임금의 덕은 오직 그 신하들에게 달려있을 따름이다.

짐이 여러 가지 정무를 새로이 거느리게 되어 혹시 잘못된 정치가 있을까 두렵다.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은 각자 봉사(封事)를 올려 현재 정치의 옳고 그름을 논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 行選官御事 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가만히 보건대,

당(唐) 개원(開元) 연간에 사신(史臣) 오긍(吳兢)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찬술하여 바침으로써 당 현종(玄宗)에게 당 태종(太宗)의 정치를 힘써 닦으라고 권한 것은 대개 일의 이치와 정황이 서로 비슷하여 같은 집안의 일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그 정치가 훌륭하고 밝아서 모범이 될 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여신 이래로 신이 알게 된 것들은 모두 신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앞선 5대 조정의 정치와 교화에 대해서 잘되고 잘못된 행적들을 기록하고, 거울로 삼거나 경계할 만한 것들을 삼가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등극하셨을 때,

시기는 재액을 당할 난세[百六之運]에 해당하였고,

운수는 천년 만에 합치한 것이었습니다.

당초에 난을 정벌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정벌할 때,

하늘이 전주(前主, 궁예)를 낳아서 그의 손을 빌렸고,

그 후에 〈태조께서〉 도(圖)와 명(命)을 받으니,

사람들이 모두 성스러운 덕을 알고서 마음으로 귀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金雞]가 스스로 멸망하는 때를 만나고

고려[丙鹿]가 다시 부흥하는 운수를 타서

고향[鄕井]을 떠나지 않고 곧 궁궐을 지었으며,

요수(遼水)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19년 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였으니,

그 공이 이보다 높을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거란의 경우에는 우리와 더불어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마땅히 먼저 우호관계를 맺어야 하며, 저들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하였습니다.

우리가 곧 그들과의 사신 왕래[交聘]를 단절한 것은 저 나라가 일찍이

발해(渤海)와 더불어 화친하였다가 갑자기 의심과 배반의 마음을 내어서 옛 맹세는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태조께서는 무도함이 심하여 함께 교류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

바친 낙타(駱駞) 또한 모두 버려서 기르지 않았으니,

심원한 계책으로 미연에 근심을 방지하고 아직 위태로워지기 전에 나라를 보호함이 이러하였습니다.

발해가 이미 거란의 군대에 의해 격파되어 홀한성(忽汗城)이 멸망하였을 때,

세자(世子)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나라가 의로움을 들어 흥기하였다 하여 그 무리 수만호를 거느리고 낮밤으로 길을 재촉하여 도망하여 왔습니다. 태조께서는 더욱 깊이 가엾게 여기시어 맞아들여 대우함이 매우 후하셨으니, 성(姓)과 이름을 내려주고, 또 그를 왕실의 적(籍)에 붙였으며, 자기 나라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고, 그 참좌(參佐) 이하의 문무 관리들에게도 또한 모두 작명(爵命)을 후하게 두루 내렸으니, 서둘러 망해버린 것을 보존하여주고 끊어진 것을 이어줌으로써 멀리 있는 자도 와서 복종하게 함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백제(百濟)의 견훤(甄萱)은 흉포하고 무도하며,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임금을 죽이고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이를 듣고 잠을 자고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여

마침내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였으니,

그 옛 임금을 잊지 않고 기울어지고 위태로웠던 신라를 바로잡고 도우심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신라 말부터 우리나라 건국 초기까지

서북쪽 변방의 백성들은 매번 여진(女眞)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오가며

침범하고 약탈하는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태조께서 제왕으로서의 고충[宸衷]으로 결단을 내리어 한 훌륭한 장수를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시니,

짧은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았는데도 도리어 오랑캐 무리들이 귀부하여 왔습니다.

이로부터 국경 밖의 먼지가 가라앉고 변경지역에 근심할 일이 없게 되었으니,

그 사람을 알고 임무를 잘 맡기며,

멀리 있는 이를 회유하고 가까이에 있는 이를 잘 쓰심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운수가 다하였다 여겨 스스로 귀화하고자 요청하였는데,

사양하기를 두세 번 한 이후에야 허락하셨습니다.

동쪽으로는 명주(溟州)에서부터 흥례부(興禮府)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110여 성들이 모두 어진 이를 마음에 품지 않음이 없

때맞추어 복종하여 왔으니,

그 예로써 사양할 줄을 알기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음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다만 남쪽으로 백제를 평정할 때에 부득이하게 병기를 사용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킨 것이 전후로 여러 차례였는데,

깃발[旌麾]과 군마[戎馬] 앞에서 혹은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항복하거나

혹은 멀리서 그 위엄을 보고[望風] 두려워 항복하였습니다.

비록 칼날을 맞대었더라도 살상을 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어진 이에게는 적이 없다.’라고 할 만합니다.

견훤이 악업을 쌓은 지 수십여 년 후에 끝내 반역한 자식[逆豎]에 의해서 감금당하게 되자

우리나라로 도망쳐 와서 병사를 일으켜 그 반역한 자식을 죽일 것을 청하였습니다.

태조께서 들으시고 후한 예로써 맞아들이셨으며,

그가 죽자 또한 후하게 부의를 보내셨으니,

그 도량이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고

그 의로움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두루 미침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백제를 평정하여 어가(御駕)를 타고 도성에 들어가셨을 때에는

곤궁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어 구휼하시고 후하게 위로하고 타이르셨으며,

여러 군대에 명령을 내려 추호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또 남과 북이 오랫동안 나뉘어 있었고, 새로 귀부한 자들과 원래 따르던 자들이 또한 구별되었지만,

그들을 한결같이 어루만져 시종 변함이 없으셨으니,

그 널리 포용함과 관대함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통일을 이룬 이후로 8년 동안 정치에 힘써 예로써 큰 나라를 섬기고

도의로써 이웃나라와 사귀었습니다.

편안할 때에도 안일하지 않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는 공경을 생각했으며,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였습니다.

궁실(宮室)을 낮추어 비바람만을 겨우 가리고자 하였으며,

거친 옷을 입어 다만 추위와 더위만을 막을 뿐이었습니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겼고,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로써 사양하는 마음이 타고난 품성에서부터 우러나왔습니다.

더욱이 백성들 사이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뭇사람들의 진정과 거짓을 모두 알지 못함이 없었고, 갖가지 위험한 일들 또한 앞서서 내다볼 수 있었으며, 그런 까닭으로 상과 벌은 그 적절한 때를 놓치지 않았고, 삿됨과 바름이 그 길을 같이 하지 못하였으니, 그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징계하는 방도를 알고, 제왕의 요체를 체득함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아서 그 재주가 묻히지 않게 하였고, 아랫사람을 잘 거느려서 그 능력이 발휘되게 하였으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았고, 삿된 자를 내칠 때에는 주저하지 않았으며, 불교를 숭상하고 유교를 중시하였으니, 군주로서의 아름다운 덕이 이에 갖추어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계책은 좇을 만하였습니다.

다만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태평한 다스림을 이룬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아직 찬란히 존숭되지 않았고,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은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으며, 여러 관아의 품식(品式)과 뭇 내외(內外)의 법식(法式)이 아직 정비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궁검(弓劍)을 버리셨으니, 온 나라 사람들의 불행이요, 진실로 믿기 어려운 하늘의 뜻으로 매우 애석하다 하겠습니다.

혜종(惠宗)께서는 오랫동안 동궁(東宮)에 계시면서 여러 차례 정사를 감독하고 군사를 위무하셨으며, 예를 갖추어 스승을 존숭하고 관료들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명성이 조정과 민간에 널리 퍼졌습니다. 처음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정종(定宗) 형제를 참소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혜종께서는 그 말을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물어보지도 않고, 은혜로 대우함을 더욱 두텁게 하여 처음과 같이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습니다.

얼마 뒤 덕정(德政)을 닦지 않으시고 과도하게 목숨을 아껴서 전후좌우로 항상 무장한 병사들이 서로 따르게 하였으니, 대개 남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군주로서의 체통을 크게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더욱이 장수와 병사들에게만 치우쳐 상을 내려서 은택이 고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안팎에서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 인심이 서로 어긋나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또 즉위한 이듬해에 곧 병을 얻어서 침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이에 조정의 어진 이들은 곁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향리의 소인배들만이 항상 침상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성을 내고 노여워함이 날로 늘었습니다. 그 3년 동안 백성들이 은덕을 입지 못하였다가 승하하시던 날에 이르러서야 겨우 뜻하지 않은 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애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종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일찍부터 명성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으시자 왕규(王規) 등이 몰래 도모하는 것이 있어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아시고 은밀히 서경[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수와 더불어

계책을 세워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에 호위 병사들이 대거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간사한 계략이 성사되지 못하였고 여러 흉악한 자들은 주살되었습니다.

비록 천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또한 사람의 지략에 달려있는 것이기도 하니,

어찌 훌륭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정종 이래로 지금까지는 38년으로서 그 사이에 왕위[洪祚]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 또한 정종의 힘입니다. 정종께서는 형제로서 계승하신 이후로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고 정성을 다하여 도리를 구하였으며, 혹은 등불을 밝히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시고, 혹은 날이 저문 뒤에야 식사를 하시면서 갖가지 정사를 듣고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하신 초기에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도참설(圖讖說)을 믿어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하고, 또 그 타고난 품성이 강직했던 탓에 고집을 꺾지 않고 가혹하게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인부들을 고되게 하였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재난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빨리 호응하였습니다. 미처 서경(西京)으로 천도하지 못한 채 영원히 왕위에서 떠나게 되었으니, 진실로 애통하다고 할 만 합니다.

광종(光宗)께서는 정종의 고명(顧命)을 받으셨는데 아랫사람을 대함에 예를 더욱 돈독히 하시고, 사람의 됨됨이를 살피심에 그르침이 없도록 살피셨으며, 가깝거나 신분이 귀한 자들을 두둔하지 않고 항상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을 억눌렀으며, 사이가 멀거나 비천한 자들을 버리지 않고 홀아비와 과부 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즉위하신 해로부터 8년 동안 정치와 교화가 맑고 태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남발되지 않았습니다. 쌍기(雙冀)가 투탁하여 온 이후로는 문사(文士)를 존숭하고 중히 여겨 은혜를 베풀고 예우함이 과도하게 후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재주가 없는 자들이 함부로 〈관직에〉 나아가고

차례를 지키지 않고 갑자기 승진하여 해를 채우기도 전에 곧 재상[卿相]이 되었습니다.

혹은 여러 날 밤을 연이어 불러 접견하시고,

혹은 여러 날을 잇달아 불러 만나시면서 이로써 즐거움을 삼았으며,

정사에 태만하고 연회를 베풀어 즐기는 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남·북의 변변치 못한 자들을 모두 특별한 예로써 대접함으로써

젊은이들은 앞을 다투어 〈관직에〉 나아가고 덕이 있는 대신들은 점차 쇠잔하여 졌으니,

비록 중국의 풍속을 중시하였으나 중국의 좋은 법식[令典]은 취하지 않았으며,

비록 중국의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를 못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고혈(膏血)과 같은 재물을 더욱 소모하게 하고,

사방으로부터는 허황된 칭찬만을 한껏 얻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시는 정사를 힘써 돌보고 빈료(賓僚)들을 접견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으니,

이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이 날로 심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것[都兪]은 날로 막혀서, 당시 정책의 옳고 그름에 대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사(佛事)를 심하게 믿어서 일상적으로 행한 재(齋)의 설행(設行)이 이미 많았고, 특별이 발원하여 향불을 피우고 기원한 것이 적지 않았으며, 오로지 오래 살며 복을 누리기만을 구하여 다만 기도만을 일삼으면서 유한한 재력을 다 소비하여 무한한 인연을 짓고자 하였고, 지극히 존귀한 몸을 스스로 가벼이 여겨 작은 선행을 짓기를 즐겼습니다.

또 연회와 놀이에 드나들면서는 극도로 사치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눈앞의 무사함이 법력(法力)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모든 행한 바를 뉘우치고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궁실(宮室)은 반드시 그 제도를 넘어서게 하였고, 의복과 음식은 모름지기 맛있고 곱기가 극에 달하게 하였으며, 토목 공사는 시기를 가리지 않았고, 기교를 부린 것을 만듦에 쉬는 날이 없었으니, 평상시에 쓴 한 해 동안의 비용을 대략 계산하면 족히 태조 10년간의 비용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죄 없는 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만약 광종이 항상 공손하고 검소하며 아껴 쓸 것을 생각하면서

처음과 같이 정치에 힘썼더라면

어찌 그 복록과 수명이 영원하지 못하고 겨우 50년을 누리는 데에 그쳤을 뿐이었겠습니까.

더욱이 경신년(960)부터 을해년(975)에 이르는 16년 사이에는 간사하고 흉악한 이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와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 군자는 받아들여질 곳이 없었고 소인배들이 그 뜻을 이루어,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노비가 그 주인을 비난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마음을 달리하고 여러 신하가 흩어져서, 옛 신하와 노장(老將)들이 서로 연이어 죽임을 당하고 골육(骨肉)과 친인척 또한 모두 제거되었으며, 게다가 혜종께서 그 형제들을 온전히 할 수 있었던 것과 정종께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막중했다고 할 수 있는데, 두 왕이 모두 오직 한명의 아들만을 두었을 뿐인데도 또한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에 대해서도 또한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경종(景宗)께서는 동궁에 계실 때에 항상 스스로 편안하지를 못하였다가 다행히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아, 어찌하여 전에는 선행을 하여 일찍이 명성을 얻었다가도 후에는 선하지 못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매우 애통한 일입니다.

경종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아녀자의 손에서 자라서

궁궐 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으나,

다만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기 때문에 후회와 과실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쌓인 참소와 비방의 글들을 불태워버리고 수년간 무고하게 옥에 갇혀있던 이들을 풀어주어 그 원통함과 분함을 다 제거하였습니다. 조정과 민간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요체를 알지 못하여 오로지 권세가 있고 호강한 자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 폐해가 종친들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재앙의 징조가 미리 나타났으니, 비록 나중에 깨닫기는 하였으나 그 책임을 돌릴 데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삿된 것과 바른 것이 구분되지 않게 되었고, 상을 주고 벌을 내림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미처 잘 다스려지기도 전에 다시 게을러져서 마침내 여색에 빠지고 향악(鄕樂)을 즐겨 관람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로는 장기와 바둑을 하루 종일 두면서도 싫증낼 줄을 몰랐고, 주변에는 오직 환관[中官]과 내시[內豎]들 뿐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의 간언은 어디에서도 들어올 길이 없었으나 소인의 말은 때마다 (왕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명성이 들렸으나 나중에는 미덕이 없게 되었으니,

이른바 ‘시작이 없는 자는 없으나, 끝을 맺을 수 있는 자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는 것

이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 중 누가 이를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는 곧 성상(聖上)께서 직접 보아서 아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경종 역시 훌륭하다고 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개 병에 걸리신 초기에 아직 병이 위독하지 않았는데도 마침내 침전에서 성상을 불러 보시고는 손을 잡고 말씀하시면서 군대와 국가를 부촉하셨으니, 사직(社稷)의 복일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들의 다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혜종과 경종 두 왕의 왕위계승은 모두 태자[春宮]로서 한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나, 사촌 형제[堂從兄弟]의 경우에는 분명한 부촉이 있지 않으면 곧 분쟁의 단서가 반드시 생겨납니다. 혜종께서는 2년 동안 병석에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흥화낭군(興化郞君)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혹 그 나이가 어려서였는지 분명하게 부촉하지 않아 일이 여러 아우들에게도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정종께서는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서 대업을 잇게 되었지만, 임종할 때에는 또한 미리 왕위를 광종에게 전하여 줌으로써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셨습니다.

정종과 경종 두 왕께서 명(命)을 남기신 것은 현명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찍이 혜종·정종·광종 세 왕께서 서로 계승하셨던 초기를 살펴보건대, 여러 가지 일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때에 개경(開京)과 서경의 문·무 관리들의 절반 이상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더욱이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참소가 일어났는데, 형장(刑章)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죄가 없는 이들이었으며, 역대의 훈신(勳臣)과 노장[宿將]들이 모두 죽임을 면하지 못하여 사라져갔습니다.

경종께서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에는 옛 조정의 신하로서 남아있는 자들이 40여 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해에도 또한 해를 입은 자들이 많았지만, 모두 후진들과 남을 참소한 무리들이었으므로 진실로 안타까워 할 만한 일이 못됩니다. 다만 천안낭군(天安郞君)과 진주낭군(鎭州郞君)은 본래 황실의 자손으로서 광종도 오히려 스스로 관용을 베풀어서 끝내 법 앞에 세우지를 않았으며, 경종 때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울타리[藩屛]가 될 만 하였는데도 도리어 권신(權臣)들에 의해서 해를 입었으니, 어찌 애통하고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덕으로써 중흥의 시기를 만나셨으며,

선왕께서 겸손하게 양위하여 주신 은혜로 인하여 선대 여러 왕들의 크나큰 사업을 이으시니,

단 하나의 생물도 그 삶을 즐기지 않음이 없고, 단 한 사람도 그 거처를 얻지 못함이 없습니다.

안팎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신들이 서로 경하하니, 이른바 ‘하늘이 내려주고, 백성들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만약 태조의 유풍(遺風)을 힘써 좇으실 수 있다면 당(唐) 현종이 태종[文皇]의 옛 일을 사모하여 따랐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또 앞선 4대 왕조의 근래의 일들을 취하고 버리실 수 있으시니, 곧 혜종께서는 골육(骨肉)을 보전하신 공이 있으니 우애하신 의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종께서는 반란의 싹을 미리 알아서 내부의 변란[蕭墻之難]을 평정하시고 종묘와 사직을 다시 안정시켜 차례로 전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렀으니, 지모가 뛰어나셨다고 할 만 합니다.

광종의 처음 8년간의 다스림은 삼대(三代)에 견줄 만하고, 또 조정의 의례와 법식은 자못 볼만한 것이 있었으니, 이른바 ‘좋음과 좋지 못함이 골고루 있다[善否之均]’는 것입니다. 경종께서는 선왕 때 억울하게 옥에 갇힌 자 수천 명을 풀어주시고 수년 동안 쌓인 참소와 비방의 글을 불태우셨으니, 이른바 ‘너그럽고 어짊이 지극함[寬仁之至]’이라는 것입니다. 무릇 앞선 4대 조정에서 정치를 행한 사적의 대략이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그 중 훌륭한 것을 취하여 행하시고 훌륭하지 못한 것은 보고 경계하시며, 급하지 않은 일은 물리치시고 이익이 없는 수고로움은 그만두셔서 다만 임금은 위에서 편안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기뻐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잘 시작하는 마음으로부터 말미암아 잘 끝맺는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날이 갈수록 더욱 삼가하여[日愼一日] 비록 쉴 때라도 쉬지 않으며,

비록 군주됨이 귀하다고는 하나 스스로를 존대하지 않고,

재능과 덕을 많이 가졌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자부하지 않는다면

곧 복은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를 것이며,

재앙은 물리치려고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

성군(聖君)으로서 어찌 10,000년을 누리지 않겠으며,

왕업이 어찌 다만 100대(代)까지만 전해질 뿐이겠습니까.

신이 또 시급한 일 28조목을 기록하여 장계(狀啓)와 함께 따로 봉하여 올리옵니다.

첫째, 우리나라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래로 47년인데, 병사들은 여전히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군량(軍糧)은 아직도 소모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서북쪽으로 오랑캐들과 이웃하고 있어서 방어해야 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상께서는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마헐탄(馬歇灘)을 경계로 삼은 것은 태조의 뜻이었으며, 압록강[鴨江] 가의 석성(石城)을 경계로 삼은 것은 대조(大朝)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간청하건대, 요충지를 선택하셔서 경계를 정하시고,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병사들을 선발하셔서 국경을 지키는 데에 충당하십시오. 또 그 중에서 2~3명의 편장(偏將)을 뽑아서 그들을 통솔하게 하시면, 곧 중앙의 군사들[京軍]은 다시 수자리를 서는 노고를 면할 것이며, 꼴과 군량을 급히 실어 나르는 비용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공덕재(功德齋)를 베풀기 위하여 혹은 직접 차를 갈고, 혹은 직접 보리를 찧는다고 하는데, 신이 생각하기에 존엄한 몸[聖體]으로 수고롭게 일하시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께서 참소와 간사한 말을 믿어서 죄 없는 이들을 많이 죽인 후 불교에서 말하는 과보(果報)의 설에 미혹되어 그 죄업(罪業)을 없애고자 백성들의 피땀 어린 재물을 빼앗아 불사를 많이 일으킨 데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혹은 비로자나참회법회(毗盧遮那懺悔法會)를 베풀기도 하고, 혹은 구정(毬庭)에서 반승(飯僧)[齋僧]을 하기도 하며, 혹은 귀법사(歸法寺)에서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를 열기도 하고, 매번 불재일(佛齋日)이 되면 반드시 걸식하는 승려들에게 공양하였으며, 혹은 내도량(內道場)의 떡과 과자를 걸인들에게 내어주고, 혹은 신지(新池)·혈구(穴口)와 마리산(摩利山) 등지의 고기 잡는 곳을 방생소(放生所)로 삼아서 1년에 4번 사신을 보내어 그 지역의 사원에 가서 불경(佛經)을 강설하게 하였습니다. 또 살생을 금하여 궁궐의 부엌에서 쓰는 고기마저도 재부(宰夫)들로 하여금 도살하지 말고 저자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으며, 대소(大小)의 신민(臣民)에게 모두 참회하도록 명함에 이르러서는 쌀·콩·땔감·숯·말먹이를 짊어지고 가서 도성 안팎의 길가에서 나누어 주는 자들이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참소를 믿게 된 이후로는 사람 보기를 잡초와 같이 하여서 베어 죽인 자가 산처럼 쌓였으며, 항상 백성들의 고혈을 다 짜내어서 재를 베푸는 데에 공양하였으니, 부처가 만약 혼령이 있다면 어찌 기꺼이 그 공양을 받겠습니까. 이때에 이르러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였으며, 여러 범죄자들 중 모습을 바꾸어 승려가 되거나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는 무리들이 와서 여러 승려들과 함께 뒤섞여 재에 참여하는 경우 또한 많았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또 승려 선회(善會)로 하여금 그 보시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그 승려가 떡과 쌀을 다른 곳에 함부로 써 버렸다가 이로 인하여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길가에 버러진 주검이 되었으니, 당시의 의론이 그를 비웃었습니다. 성상께서는 군왕의 체통을 바르게 하셔서 이익이 없는 일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 조정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군졸들은 태조 당시에는 다만 궁성(宮城)을 숙위하는 일에만 충당되었기에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광종께서 참소를 믿어 장수와 재상들을 죽이거나 문책하고,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됨에 이르러서는 주(州)·군(郡)의 풍채가 있는 자들을 뽑아 궁궐에 들여 호위하게 하였으니, 당시의 의론이 번거롭고 이익이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경종 때에 이르러 비록 조금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오늘 날에는 그 수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좇아서 다만 날래고 용맹한 자들만을 남겨두시고 그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돌려보내신다면 사람들 사이에 탄식과 원망이 없어질 것이며, 나라에는 비축물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넷째, 성상께서 미음·술·메주·국을 길가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신이 삼가 말씀드리건대, 성상께서는 광종의 죄업을 제거하고 널리 베풀어 〈선한〉 인연을 맺고자 한 뜻을 본받고자 하시지만, 이는 이른바 ‘작은 은혜는 두루 미치지 못한다[小惠未遍]’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밝게 상을 주고 벌을 내려서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장하신다면 복을 부르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세한 일 같은 것은 임금이 정치를 행하는 요체가 아니니,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우리 태조께서는 큰 나라를 섬기는 데에 마음을 전일하셨음에도 오히려 수년에 한번 폐백[行李]을 보내어 교빙의 예를 갖추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지금은 교빙을 위한 사신뿐만 아니라 또 무역으로 인한 사신도 빈번하니, 중국에서 천하다고 여길까 염려됩니다. 또 오가다가 배가 침몰함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는 자들도 많습니다. 지금부터는 교빙을 위해 보내는 사신이 무역을 겸하게 하시고, 그밖에 수시로 매매하는 행위는 모두 금지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불보(佛寶)에 배정된 돈과 곡식은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각각 주·군에 사람을 파견하여 담당하게 하는데, 해마다 절반에 달하는 이자[長利]를 받아 백성들을 고되고 어지럽게 하고 있으니, 모두 금지시키기를 바랍니다. 그 돈과 곡식은 사원의 전장(田莊)으로 옮겨 설정하고, 그 주전(主典)이 전정(田丁)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도 함께 거두어서 사원의 전장이 있는 곳에 붙인다면 곧 민간에 끼치는 폐해가 자못 줄어들 것입니다.

일곱째,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집집마다 가서 매일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냄으로써 백성들의 이익과 손해를 가서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祖聖]께서도 통일한 후에 외관(外官)을 두고자 하셨지만, 대개 초창기라 일이 번다하여서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삼가 향리의 토호들을 살피건대, 항상 공무(公務)를 핑계 삼아 백성들을 침학(侵虐)하므로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외관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한 번에 모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10여 개의 주현(州縣)을 아울러서 한 곳의 관아를 설치하고, 관아마다 각각 2~3명의 관원을 두어서 돌보는 임무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여덟째, 엎드려 살피건대, 성상께서 사신을 보내어 사굴산(闍屈山)의 승려 여철(如哲)을 맞아 궁궐로 들이셨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여철이 정말로 남을 복되게 할 수 있는 자라면, 그가 거처하던 곳의 물과 땅도 또한 성상의 것이고, 아침과 저녁으로 먹고 마신 것 또한 성상께서 내려주신 것이므로 필시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항상 복을 기원하는 것을 일로 삼았어야 할 것인데, 어찌 번거롭게 맞아들여 온 이후에야 구태여 복을 베풀어 준다는 것입니까. 전에 선회라고 하는 자가 요역(徭役)을 회피하고자 출가하여 산 속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광종께서 공경을 표하고 예를 다하셨지만, 끝내 선회는 길가에서 예기치 못한 채 참혹하게 죽어 그 시신이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저 평범한 승려의 경우에 자신 또한 화를 당하였는데, 무슨 겨를에 남에게 복을 베풀어 주겠습니까. 여철을 내쫒아 산으로 돌려보내셔서 선회와 같은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홉째, 신라 때에는 공(公)·경(卿)·백관[百僚]·서인(庶人)의 의복과 신발·버선에 각각 품(品)에 따른 구분이 있어서 공·경·백관이 조회(朝會)할 때에는 공란(公襴)을 입고 신발을 신고 홀(笏)을 들었으며[穿執], 조회에서 물러 나와서는 편한 대로 옷을 입었고, 서인과 백성들은 무늬가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으니, 귀함과 천함을 구분하고 높고 낮음을 변별하고자 한 까닭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공란은 비록 토산물이 아니지만 백관들은 스스로 마련하여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조정은 태조 이래로 귀한 자와 천한 자를 막론하고 임의대로 옷을 입고 있으니, 관품(官品)이 비록 높을 지라도 집안이 가난하면 곧 공란을 마련할 수가 없으며, 비록 관직은 없더라도 집안이 부유하면 곧 무늬가 있고 수가 놓아진 비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토산물 중에는 좋은 것이 적고 거친 것은 많으며, 무늬가 있는 것들은 모두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입을 수가 있으니, 곧 다른 나라의 사신을 영접할 때에 백관의 예복이 법식에 맞지 않아서 창피를 당할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백관들로 하여금 조회할 때에는 모두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과 신발·홀을 갖추고, 정사에 관하여 아뢸 때에는 버선목이 달린 신[襪靴]·명주신·가죽신을 착용하게 하시며, 서인들은 무늬가 있는 깁과 주름이 잡힌 비단을 입지 못하고 다만 명주[紬絹]만을 사용하게 하십시오.

열째, 신이 듣건대, 승려들이 군(郡)·현(縣)을 오갈 때에 관(館)·역(驛)에 숙박하면서 지방 아전들과 백성들을 채찍질하고 마중하고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늦다고 꾸짖는데, 아전과 백성들은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지 의심하면서도 두려워서 감시 말을 하지 못하니, 그 폐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승려들이 관·역에서 숙박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폐단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열한째, 중국[華夏]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만, 사방의 습속은 각각 그 풍토의 성질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다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악(禮樂)·시(詩)·서(書)의 가르침과 군신(君臣)·부자(父子)간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음으로써 비루한 것을 개혁하고, 그 나머지 거마(車馬)나 의복의 제도는 토풍을 따라도 좋을 것이니, 사치와 검약이 적절하도록 하신다면 무작정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열두째, 여러 섬에 사는 백성들은 그 선대의 죄로 인하여 바다 한가운데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생계를 꾸리기가 매우 어려우며, 또 광록시(光祿寺)에서 수시로 물품을 징수하여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있습니다. 주·군의 예를 따라서 그들의 공역(貢役)을 공평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열셋째, 우리나라는 봄에는 연등회(燃燈會)를 설행하고 겨울에는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기 위해 널리 사람들을 징발하는데, 그 노역이 매우 번거로우니, 감축하여서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시기 바랍니다. 또 갖가지 인형들을 만드는 데에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들지만, 한 번 사용한 이후에는 곧장 부수어 버리니, 이 또한 심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또 인형은 흉례(凶禮)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으로서 중국[西朝]의 사신이 일찍이 와서 보고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얼굴을 감싸고 지나가기도 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쓰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넷째,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성인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천하가 화평하다’라고 하였으며, 『논어(論語)』에서는 말하기를, ‘하는 일이 없어도 천하가 잘 다스린 이는 순(舜)이니, 대저 어떻게 한 것인가. 몸을 공손히 하고서 바르게 남면(南面)하였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키는 까닭은 순수한 덕과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다잡아 겸손히 하고,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예로써 신하들을 대우하신다면, 그 누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아가서는 계책과 도리를 아뢰고 물러나서는 보좌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군주는 신하를 부리기를 예로써 하고, 신하는 군주를 섬기기를 충심으로써 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날이 갈수록 더욱 근신하고[日愼一日], 스스로 교만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을 대함에 공손함을 생각하고, 만약 혹시 죄지은 자가 있더라도 그 경중을 법에 맞게 아울러 논의하신다면 곧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위업은 서서 기다려도 될 것입니다.

열다섯째, 태조께서는 궁궐에 소속된 노비로서 궁궐에서 공역(供役)하는 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교외로 나가 거주하면서 밭을 갈아 세금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궁궐 내 마구간에 있는 말 중 당장 부리는 것 외에는 궁 밖의 마구간으로 나누어 보내 기르게 함으로써 국가의 재정[國用]을 절약하였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켜 부역이 날로 번다하여지자, 이에 바깥에 있는 노비들을 징발하여 부역에 충원하였고, 내궁(內宮)의 재정으로는 지급하기에 부족하여 창고의 쌀을 아울러 소비하였습니다. 지금 궐내의 마구간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아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드니,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고 있으며, 변경지역에 변란이 생길 경우에는 군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모두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중의 노비와 마구간 말의 수를 잘 헤아려 결정하시고, 그 나머지는 모두 궁 밖으로 나누어 내보내시기 바랍니다.

열여섯째, 세상의 풍속에서는 선근(善根)을 심는다는 명목으로 각자 자신의 바라는 바를 따라 불당(佛堂)을 지으니,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또 도성 안팎에 있는 승려들도 앞을 다투어 지으면서 널리 주·군의 장리(長吏)들에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사역하되 국가의 부역[公役]보다도 더 급하게 하도록 권유하니, 백성들이 이를 매우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엄중하게 금지시키셔서 고된 부역을 덜어주시기 바랍니다.

열일곱째, 『예기(禮記)』에서 말하기를, ‘천자(天子)의 집은 9척(尺)이요, 제후(諸侯)의 집은 7척이다’라고 하였으니, 각자 정해진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근래에 사람들 사이에 높고 낮은 구분이 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곧 모두 집을 짓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군·현과 정(亭)·역(驛)·나루터[津渡]의 호강한 자들이 앞을 다투어 큰 집을 지어 그 법도를 넘어서게 되었으니, 단지 한 집의 힘을 다 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백성들을 고되게 하는 것으로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그 높고 낮음에 따라 가옥의 제도를 헤아려 정하게 하시고, 도성 안팎에서 모두 준수하게 하시며, 이미 지은 가옥 중 제도를 어긴 것들은 또한 헐어버리게 함으로써 훗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열여덟째, 불경을 베껴 적고 불상(佛像)을 만드는 것은 단지 오랫동안 전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하여 진귀한 보배로 장식을 함으로써 도적질 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까. 옛날에는 경전을 모두 누런 종이에 베끼고 또 전단목(旃檀木)으로 축(軸)을 만들었으며, 불상은 금·은·동·철을 쓰지 않고 다만 돌·흙·나무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훔치거나 훼손시키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신라 말에는 경전과 불상을 모두 금과 은으로 만들어서 그 사치함이 도를 지나쳤기 때문에 끝내는 멸망하여 장사치들로 하여금 불상을 훔치고 훼손하여 서로 사고팔아 생계를 꾸리게 하기에 이르렀는데, 근래에도 그 남은 풍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엄중히 금지하셔서 그 폐단을 개혁하시기 바랍니다.

열아홉째, 옛날 진(晉)의 덕이 쇠하자 난(欒)·극(郤)·서(胥)·원(原)·호(狐)·속(續)·경(慶)·백(伯) 등의 성씨들이 강등되어 관노(官奴)[皁隷]가 되었습니다. 우리 삼한공신(三韓功臣)의 자손들은 매번 왕의 특별 사면령[宥旨]을 받을 때마다 포상을 내리겠노라고[褒錄] 하였으나, 아직도 관작(官爵)을 받지 못하여 관노 사이에 섞여 있으니, 새로 나아간 무리들이 능멸하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아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광종 말년에는 조정의 신하들을 죽이거나 축출하였기 때문에 대대로 이어져 온 집안의 자손들은 그 가계를 이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내려진 은혜를 따라서 공신들의 등급에 맞게 그들의 자손들을 등용하시기 바랍니다. 또 경자년(940)의 전과(田科) 배분과 삼한의 통일 이후에 입사한 자들도 또한 헤아려 품계와 관직을 내려준다면 억울한 누명을 풀어 재해가 발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스무째, 불법(佛法)을 존숭하고 믿는 것이 비록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제왕과 일반 백성들이 공덕을 쌓는 것은 그 방법이 실로 같지 않습니다. 일반 백성 같은 경우에는 수고롭게 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요, 소비하는 것은 자기의 재물이므로 그 폐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괜찮다고 하겠지만, 제왕의 경우는 곧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梁) 무제(武帝)가 천자의 존귀한 몸으로 필부(匹夫)들이 하는 선업(善業)을 닦았더니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은 이러한 이유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왕은 그러한 점을 깊이 생각하여 일마다 모두 적절함을 헤아려서 폐해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사람의 화복과 귀천은 모두 태어나는 초기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마땅히 그대로 따라서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불교를 숭신하는 것은 다만 다음 생에서 받게 될 인(因)에 따른 과보(果報)를 심는 것일 뿐, 그 결과가 현재에 나타나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 드물다고 하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가 거기에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또 〈유·불·도〉 삼교(三敎)는 각자 업(業)으로 삼아 수행하는 바가 있으니, 섞어서 하나로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닦는[修身] 근본이요, 유교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자신을 닦는 것은 다음 생을 위한 바탕이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날에 힘쓸 일입니다. 오늘날은 지극히 가깝고 다음 생은 지극히 먼 것인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군주는 마땅히 사사로움이 없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널리 만물을 구제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어찌 원치 않는 사람을 부리고 창고에 쌓아 둔 재물을 소비하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익을 추구하겠습니까. 옛날에 당(唐) 덕종(德宗)의 비부(妃父) 왕경선(王景先)과 부마(駙馬) 고염(高恬)이 황제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금동불상(金銅佛像)을 주조하여 바쳤는데, 덕종이 말하기를, ‘짐은 일부러 쌓은 공덕은 공덕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마음이 비록 실제로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이익이 없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겨울과 여름에 열리는 강경회(講經會)와 선왕(先王)·선비(先后)의 기일재(忌日齎)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취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없지만, 그 나머지 줄일 수 있는 것들은 줄이시기 바랍니다.

스물한째, 『논어(論語)』에서 말하기를, ‘마땅히 섬겨야 할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좌전(左傳)』에서 말하기를, ‘귀신은 그 족류(族類)가 (지내는 제사가) 아니면 흠향(歆饗)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삿된 제사[淫祀]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의 종묘와 사직에 대한 제사는 오히려 법식에 맞지 않는 것이 여전히 많은데도 산악(山嶽)에 지내는 제사와 성수(星宿)에 지내는 초제(醮祭)는 그 번잡함이 도를 넘어섰으니, 이른바 ‘제사는 자주 지내서는 안되는 것이니, 자주 지내면 번잡해지고, 번잡해지면 곧 공경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공경을 지극하게 하여 진실로 태만한 바가 없을지라도 향관(享官)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 싫증내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신이 기꺼이 흠향하겠습니까. 옛날에 한(漢) 문제(文帝)는 모든 제사에서 그 유사(有司)로 하여금 공경히 하되 〈복을〉 빌지는 못하게 하였으니, 그 식견의 뛰어남이 크고 훌륭한 덕이라고 할 만 합니다. 만약 천지신명에게 지각이 없다고 한다면, 〈빈다고 한들〉 어찌 복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지각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을 위하여 사사롭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군자도 오히려 좋아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천지신명이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그 노동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만약 백성들의 힘을 쉬게 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한다면 그 복이 반드시 빌어서 받는 복보다 클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별도로 올리는 기도와 제사를 없애고, 항상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자신을 나무라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하늘을 감동시킨다면 재해는 저절로 사라지고 복록은 저절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스물둘째, 우리 조정의 양천(良賤)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거니와, 우리 태조께서 창업하신 초기에 여러 신하들 중 본래부터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자를 제외한 나머지 본래부터 소유하지 않았던 자들은 혹은 군대를 따라 전쟁에 나가서 포로를 얻거나, 혹은 재물로 사서 노비로 삼았습니다. 태조께서는 일찍이 포로들을 풀어주어 양민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이 있는 신하들의 마음을 동요시킬까 염려되어 편의대로 하도록 허락하였더니, 60여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하소연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서 노비들을 자세히 살펴서 그 옳고 그름을 판별하게 하니, 이에 공신(功臣)들 사이에서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음이 없었음에도 간언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대목왕후(大穆王后)께서 간절하게 간언하셨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천민과 노비들이 힘을 얻어서 존귀한 이들을 능멸하고 짓밟았으며, 앞을 다투어 거짓을 꾸며내어 본래의 주인을 모함한 것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광종께서 스스로 재앙의 근원을 만들고도 막지 못한 것이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억울하게 죽인 자들이 매우 많아 덕을 크게 잃어버렸습니다. 옛날에 후경(侯景)이 양(梁)의 대성(臺城)을 포위하였을 때, 근신(近臣)인 주이(朱异)의 가노(家奴)가 성을 넘어서 후경에게 투항하니, 호경이 의동삼사(儀同三司)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 가노가 말을 타고 비단 도포를 입고서 성 앞에 와서 외치기를, ‘주이는 50년 동안 벼슬을 지내고 나서야 중령군(中領軍)이 되었지만, 나는 후왕(侯王)에게서 처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는데도 이미 의동삼사가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하인과 종들이 앞을 다투어 밖으로 나와서 후경에게 투항하니, 대성이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전날의 일들을 깊이 비추어 보아서 천한 자들이 귀한 이들을 능멸하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의 본분에 있어서 그 중도(中道)를 잡아 처리하십시오. 대개 관직이 높은 자들은 도리를 알기 때문에 법에 어긋나는 일이 드물며, 관직이 낮은 자들은 진실로 그 지략이 교묘한 방법으로 잘못을 덮을 만하지 않고서야 어찌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다만 왕실의 일원이나 공·경들 가운데 비록 위세로써 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들이 혹시 있더라도 지금의 정치가 거울과 같이 밝아서 사사로움이 없는데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주(周)의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도리를 잃어버렸으나 선왕(宣王)과 평왕(平王)의 덕을 가리지는 못하였고, 여후(呂后)가 덕이 없었지만,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어짊에 누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의 판결을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는 데에 힘쓰시되, 앞선 조정에서 결정한 바는 거슬러 따져서 분란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최승로는 왕이 뜻을 지니고 있어서

더불어 일을 해 낼만 함을 보고서 이 글을 바친 것인데,

나머지 여섯 조항은 경술년(1010)의 병란으로 잃어버렸다.

참고 : 거란의 2차 고려침입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이를 수습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전쟁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거란 성종의 궁극적인 목표가 강조 제거가 아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10년(현종 원년) 11월, 거란의 성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40만 대군이라 칭하며 고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고려는 당시 강조의 지휘 하에 30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거란군의 진격로 상에 위치한 변방의 각 성들도 전투를 준비하였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다. 양규(楊規)가 이끄는 고려군은 흥화진을 지키며 수차례에 걸친 거란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에 거란군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잔류시키고, 나머지 반으로 개경을 향해 내려갔다. 일차적으로는 고려가 성공적인 방어를 했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흥화진을 우회한 거란군이 다음으로 고려군과 마주친 곳은 통주(通州)였다. 바로 강조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강조는 먼저 자리를 잡은 지리적 이점에 검차(劍車)를 이용한 전술 활용으로 초반에 잘 방어하였지만, 후반에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방심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결국 통주전투(通州戰鬪)에서는 강조뿐만 아니라 부장 이현운(李鉉雲) 등 다수의 장수들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병력도 큰 피해를 입고 흩어졌다.

다행히 통주성(通州城)은 함락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주력부대가 무너지면서 고려군의 전열은 크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비록 서경(西京)은 힘겨운 전투 끝에 지켜낼 수 있었으나,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산(正祖)의 시– 망묘루(望廟樓)에서 재숙(齋宿)하면서 (홍재전서5권시1) & 최승로의 시무28조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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