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 0423: 네 사랑은 최소한의 숨 (2024)

본편은 무료이며 하단에 소장용 포인트가 있습니다.

만취 상태에서 한 내기도 성립이 되나요.

나 너 진짜 안 좋아할 거야.

그래?

성과 축하하는 자리 주인공이었던 김여주가 술도 못 빼고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던 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찬 바람 쐬고 있었던 때. 김여주 앞에 쭈그려 앉아 초코우유 내미는 남자 얼굴에다 대고 취기를 빌려 내뱉은 말이었다.

그럼 내기 하자.

먼저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걸로.

눈 하나 깜짝 안 하며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은 안 난다. 눈 끔뻑이며 듣던 김여주가 고개를 끄덕였고, 김여주 손에는 남자가 사 온 초코우유가 들려 있었다는 거. 결과가 정해진 게임이었다. 김여주가 만취 상태로 이제노한테 내뱉은 말의 청자는 이제노가 아니라 김여주여야 했다. 나 이제노 진짜 안 좋아할 거야. 안 좋아하고 싶어.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자신이 없었다. 이제노를 안 좋아하는 일 같은 건.

FILE 0423: 네 사랑은 최소한의 숨 (1)

자매품처럼 이제노를 달고 다니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있다. 넌 이제노랑 안 사귀어? 그럴 때마다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못 박듯이 말하는 쪽이 대부분 마음이 있는 쪽이다. 눈치 살살 살피면서 대답 회피하는 건 이제 뻔하고 티도 잘 난다고, 아예 그럴 싹조차 없는 것처럼 굴어야 마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남들 보기에 ‘유니콘’처럼 보이는 남자를 좋아하는 일은 김여주가 직업으로 삼은 일보다 빡세고 힘든 일이었다. 친구라는 이름에만 적힌 선이 몇 개야, 넘어가려면 한 세월은 걸려야 했다. 이제노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미래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대하는 행동이 완전히 달랐고, 김여주는 이제노가 김여주에게 하는 행동이 명백히 친구 사이라서 가능한 일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얘랑 같이 하는 거야?”

“이번에도.”

조금만 붙어 있거나 임무를 같이 하기라도 하면 주변에서 엮어대는 일이 허다했다. 이제노가 어쩌다 한 번 김여주 챙겨주면 난리. 관계 당사자들은 조용한데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꼴값을 떠는 타입. 김여주가 이제노 성을 떼고 부른 날에는 둘 사이 드디어 유의미한 변화가 생긴 거냐며 다들 관심을 한 번씩 툭 던지고 지나갔다. 소식 듣겠다고 달려오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둘 관계가 조직 내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었으나 김여주는 절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남들 눈에 좋게 보이는 떡 당연히 김여주 눈에도 좋게 보인다. 그러나 이건 건너갈 수 없다.

“이번 건 나 혼자 해도 충분해.”

“잠입은 원래 둘이 기본이야.”

“알아. 아는데.”

“마약이라서 좀 복잡해. 혼자 갔다가 괜히 일 생기는 것보단 낫지.”

김여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만 보면 주체도 못 하고 뛰는 심장 잠재우려면 차라리 안 보는 게 약이었다. 곤란하다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앞에 앉아서 서류 훑는 이제노를 힐끔 쳐다보고 눈치 보는 것 말고는. 오랜 시간 동안 친구였던 덕에 서로 아는 게 많다는 건 일을 할 때 합을 맞추기 쉽다는 걸 의미했다. 성격부터 특성, 하물며 일하는 방식까지도 전부 공유하게 된 둘 사이에 웬만해선 비밀은 없었다. 못 볼 꼴도 보여준 김여주한테 마음을 품기보단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다는 점.

“호텔 하나 털러 가는데 컨셉이 신혼부부야. 미치겠다.”

“가장 접근하기 좋은 방식이야. 서류 안 읽어볼래?”

“아 알겠어. 머리 때리지 마.”

분위기에 휩쓸리는 법 없던 김여주가 하필 그날 휩쓸려서. 말도 안 되는 내기를, 그것도 김여주가 먼저 말을 꺼내서 시작해 놓고 없던 일로 해 버리기엔 쫀심이 상해서 그대로 진행 중이었다.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일을 이제노도 기억하고 있었고, 암묵적으로 진행되는 내기는 데드라인도 정해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었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 마음이 엮인 이상 김여주는 사소한 거에서도 이제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이제노. 너 할 거야?”

“해야지. 너랑 하면 편한데.”

“알지. 나도 너랑 하는 게 편해.”

특수팀 팀장들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태어나 보니 엄마아빠 둘 다 특수조직 출신에 스파이 업무까지 척척 해내던 베테랑들이라는 거.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이 일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다. 6살에 총 잡는 법 떼고 들어온 김여주는 총 다루는 거 하나엔 자신이 있었다. 몸 쓰는 일은 좀 밀릴 수 있어도, 두뇌 회전 속도가 빨라서 전략 짜는 것도 잘했다. 자존심 빼면 시체. 물려받은 유전자가 이미 충분히 이 일에 최적화된 상태였으며, 김여주 재능 플러스 노력 덕분에 최연소 팀장 달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정해진 신분에 토 달지 맙시다.”

“치사하게 권력으로.”

“권력 따지면 나보다 네가 더 세.”

정부 산하 조직이라 외부 발설 시 즉시 사살. 뭐 하나 실수하면 뼈도 못 추리는 계약 조건들을 보고서도 김여주와 이제노는 당연하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도장 찍었다. 김여주와 비슷한 유년 시절 보낸 이제노라고 다를 건 없었다. 성격 비슷한 둘이 붙어 다니면서 싸운 적 한 번도 없는 것도 신기했다. 여차하면 맞추고 아니라면 말하고 고치면 그만. 일할 때만큼은 감정 다 빼고 효율 따지는 게 판박이였다. 덕분에 같이 일 나가서 감정 상할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김여주는 가능한 오래 이제노와 친구로 지내면서 일이나 하고 싶었다.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남고 싶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기 전까진.

“보고 올린다. 수정할 거 있으면 지금 알려줘.”

“더 봐야 할 건 없고?”

“리스트 뽑아줄게. 지원 더 필요하면 말하고.”

친구 이상을 꿈꾸는 김여주와 조건이 붙은 다정을 제한 없이 턱턱 내어주는 이제노. 가장 큰 조건은 호의를 호감으로 착각하지 않기. 커다랗게 엑스표가 붙은 항목에서 엑스표를 떼어내고 싶어도 그건 김여주의 의지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김여주가 먼저 선을 넘어버린 건 술 취해서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멋대로 입을 나불거린 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제노가 선 안으로 다시 쭈욱 밀어준 덕분에 내기를 하는 걸로 사건은 종결될 수 있었지만. 이만큼 이제노를 오래 봤는데도 아직 김여주가 모르는 것들 천지였다. 이제노는 쉽게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이 일에 아주 적합해.

“이거까지 성공하면 성과금 두 배.”

“돈맛 좀 보겠네.”

“이 임무 끝나면 휴가라도 다녀오든지.”

계약서에 나란히 이름을 적었다.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같은 일에 쏟아부었으나, 아직도 같이 이름 적는 건 좀 어색했다. 이제노와 김여주 이름이 적힌 계약서를 가지고 간 나재민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처음으로 이제노랑 단둘이 일을 했던 날, 까딱하면 둘 다 목 날아가는 상황에서, 하필 그날, 긴장했던 김여주가 덜덜 떠는 손으로 총을 쏘기를 망설였을 때. 이제노는 망설임 없이 김여주 손을 붙잡고 방아쇠를 잡아당겼고, 그 덕분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이제노가 김여주한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나 있잖아. 네 옆에.

“다친 곳은.”

“뭐가.”

“저번에 어깨 스쳤잖아. 치료는 받았어?”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걱정 안 해도 된다.”

덤덤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여주가 어디 하나 다쳐서 오면 제일 걱정하는 것도 이제노였다. 붕대 칭칭 감긴 곳을 빤히 바라보며 다음엔 제발 안 다쳐서 오면 안 되냐고 말할 때마다 노력해 보겠다고 어물쩍 넘겼다. 위험한 일을 하는 직업인데 어떻게 그래. 과한 걱정. 과한 참견. 과한 배려. 이제노 성정이 원래 저런 놈인 걸 알고 있다. 이제노랑 얼굴 맞댄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더 긴 김여주조차 이제노한테 살랑살랑 흔들리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안 흔들릴 수가 있나.

“다음 주부터 바로 들어가는 걸로.”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뭐야.”

김여주와 이제노가 새로 받은 위장 신분은 3개월 된 신혼부부였다. 타이밍이 구렸다. 하필 내기 중일 때 사랑하는 척 연기해야 하는 신분을 받다니. 김여주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었고 뭐든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상대가 이제노라면 의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눈만 봐도 아는 사이가 무서운 건 속삭이는 사랑이 거짓인지 사살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는 거. 그러니 김여주는 이 임무에서 어떻게든 거짓된 사랑만 속삭여야 했다. 눈동자가 잠깐이라도 흔들리는 순간 마음 다 들통나는 꼴이니까. 첫째, 드러내지 말 것. 둘째, 흔들리지 말 것. 셋째, 이제노가 주는 거짓 사랑을 진짜라고 착각하지 말 것.

“나랑 이런 일 하는 거 안 불편해?”

“왜.”

“그냥. 컨셉이 좀 독특해서 이번에는.”

친구 사이에 사랑하는 연인 연기를 하는 건 그다지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저번 임무는 잠입 아니고 그냥 창문 부수고 들어간 거라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었으나…… 순식간에 이제노랑 5년 사귀고 결혼한 상세한 설정까지 보게 된 김여주 입꼬리가 잠깐 축 내려갔다. 껄끄럽다고 해서 안 할 순 없었다. 김여주와 이제노가 가장 잘할 일이라면 둘이 하는 게 맞으니까. 효율만 생각해 봤을 땐 김여주였어도 둘을 시켰을 테니까. 애매하게 하는 순간 다 들키고 말짱 도루묵 되는 거 순식간이라, 마음 단단히 먹고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게 잠입이었다.

“불편할 이유가 없지.”

“그래?”

“차라리 너랑 하는 게 나아.”

아는 것도 없는 사람과 신혼부부랍시고 얼굴 맞대고 손을 잡는 것보단 익숙한 사람이랑 하는 게 백 번 나았다. 아는 게 많으니 질문이 들어와도 유하게 대답할 수 있고. 잔잔한 웃음 매단 채로 노트북 덮은 이제노도 김여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데리러 갈게.”

“혼자 갈 수 있어.”

“부부가 따로 들어가면 이상하잖아.”

좋아할 만한 이유가 수백 가지인 사람에게서 좋아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김여주와 이제노가 같은 조직에서 동료로 합을 맞추는 동안에는, 둘 사이 관계가 친구라는 걸 깨뜨리지 않고 유지해야 할 단단한 벽으로 인식해야 했다. 두드리지 마세요. 어차피 깨지지 않으니까.

일주일 동안 아주 대차게 놀림을 받았다. 바꾼 신분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김여주가 돌아다닐 때마다 이제노랑 결혼한 지 3개월 된 병아리 신혼부부 너무 축하한다는 장난기 섞인 말을 들어야 했다. 얼굴을 숨기고 다닐 수도 없고, 장난을 치겠다고 남편분이랑은 어떻게 지내냐는 말을 들으면 반응을 할 수가 없어 자주 고장 나곤 했다. 그래서 잠입 어떻게 할래. 빈정대는 친구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흘릴 수 있는 문제인가 이게.

“늦었네.”

“누구 덕분에 덩달아 유명 인사가 되어서요.”

“사진 미리 봐 둬.”

하루 전, 미리 잡아둔 호텔로 가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오늘부터 일 나가는 거야? 쏟아지는 질문 세례는 이제노를 향한 건지 김여주를 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눈 피해서 내려오겠다고 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졌다. 헤드라이트 켜진 차 조수석에 올라타자 이제노가 히터 세기를 줄인다. 차가운 기운 잔뜩 몰고 온 김여주 얼굴로 뜨뜻한 바람이 닿았다. 언제부터 기다렸어. 손으로 벨트 꾹꾹 잡아 누르면서 묻자 핸드폰 보고 있던 이제노가 뒷좌석에 올려두었던 종이 뭉치를 내민다.

“얼마 안 기다렸어.”

“차 오랜만에 탄다. 너 아직도 이거 달고 다녀?”

“튼튼하던데.”

“이거 사 준 지가 언젠데.”

이제노가 백미러 옆에 달고 있는 건 처음 차 뽑은 날 김여주가 준 선물이었다. 자꾸 눈에 보이다 보면 김여주 생각 조금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불순한 의도와는 다르게 꼬질해진 놈은 이제 봐도 김여주 얼굴은커녕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허벅지에 끼워 뒀던 총을 발밑에 내려놓으며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남이 주는 젤리 받아먹지 마.”

“시시한 건 안 받아먹어.”

“책상에 잔뜩 쌓여 있는 건 뭐지.”

“그거야 네가……!”

“조심해.”

당 충전 하랍시고 젤리를 두 박스나 사서 김여주 사무실에 내려놓을 땐 언제고. 입꼬리 당겨 웃은 이제노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호텔까지 20분. 어제 마지막으로 보고서 올리지 않으면 오늘 아침부터 바쁠 걸 알아서, 이 악물고 잠 줄여가면서 일을 했더니 좀 피곤했다. 히터 바람 줄였는데도 졸음이 눈꺼풀로 쏟아지는 기분이라 글자를 읽어내는 내내 하품을 했다.

“호칭을 좀 바꾸자.”

“갑자기?”

“이제 부부인데 야, 너, 할 순 없잖아.”

“아아. 어.”

맞는 말이긴 했다. 김여주 머릿속에 비상 스위치가 눌렸다. 이제노 이름 성 떼고 부르는 것도 낯간지러워서 무조건 이제노 이제노, 꼬박꼬박 성 붙여 부르는 김여주한테 애칭이라니. 산 넘어 산이었다.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선 허점이 없어야 했다. 싱글벙글 웃는 이제노와는 다르게 김여주 입술은 삐죽 빗나갔다. 좋을 거 하나 없는 역할 놀이였다.

“자기 정도는 불러줄게.”

“이름 불러도 되는데.”

“…….”

“제노야, 하면 되잖아. 나한테 자기라고 부르고 싶어?”

뭐가 그렇게 웃기고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호칭이라고 해서 당연히 연인 사이 주고받는 말이라 생각했던 김여주 입에선 이제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낯간지러운 말이 나왔다. 창밖을 보고 사색에 빠진 채로 답한 김여주 시선이 이제노 쪽으로 돌아갔다. 손등으로 입술 가리고 웃는 얼굴이 보여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럼 그냥 처음부터 이름 불러달라고 하면 되지. 괜히 김여주 바램만 툭 던진 꼴이고, 이번에도 이제노한테 빈틈 잔뜩 보이는 마음만 홀라당 보여준 기분이라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자기라고 해 그럼. 기왕 부른 김에.”

“싫어.”

“기껏 뱉어놓고 왜 싫대.”

“아 싫어. 우리 사이에 무슨 자기야.”

“우리 결혼했잖아.”

어릴 때 게임 속에서 결혼했던 경험 딱 한 번 갖고 있는 김여주한테 결혼이란 단어는 너무 무거웠다. 특히나 그 속에 이제노가 있다면 더더욱. 단 한 번도 가벼운 적 없었던 이름이 담고 있는 것들이 김여주한테는 버겁도록 컸다. 능청스러운 성격도 아니었으면서 날이 갈수록 여유로워지는 게 좀 짜증 났다. 그러지 않아도 김여주는 온 마음을 다해서 좋아할 텐데 굳이. 사람 좋은 웃음 방싯 짓고 다니던 순순이 이제노한테 이제 버터 냄새가 조금씩 나는 것도 같았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인 거 알지.”

“내가 이 일 한두 번 해 보나.”

“이번에는 좀 다르네. 느낌이.”

답지 않게 생포가 목적이었으나 수틀리면 죽여도 됐다. 장장 몇 달 동안 골머리 앓게 만든 놈들 뒷덜미를 드디어 잡을 수 있게 됐으니 우리 식으로 구슬려서 불게 만드는 게 가장 이상적인 계획이었다. 고개 두 번 정도 꺾어야 모든 건물을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높은 호텔은 겉으로 봤을 땐 여느 번지르르한 호텔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약이 유통되는지는 극소수만 아는 것 같았다. 들어가는 사람들이 죄다 눈깔 맛탱이가 간 건 아닌 걸 보니. 자연스럽게 이제노 팔뚝에 팔을 감은 채로 몸을 붙였다. 한다면 하는 여자 김여주. 심장이 난리가 나든 말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방을 하나로 잡으셨겠다.”

“부부가 방을 따로 잡으면 어떡해.”

“…….”

“침대에서 자. 내가 거실에서 잘게.”

당연히 방이 두 개라고 생각한 김여주가 멍청했다. 요즘 부쩍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아지네. 엘리베이터 벽에 기댄 채 스스로 되뇌었다. 같은 방에 단둘이 같이 있어도 아무 일 안 일어나는 게 정상이다. 김여주만 조심하면 된다.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이 금방 뱉어낼 수 있을 정도로 부풀었다고 해도 지금은 타이밍이 좀 구렸다. 사실 이 일이 시작되기 전부터 구린 것들은 천지였지만.

“이런 건 어떻게 뚫었대. 새삼 대단.”

“우리 위에 누가 있는데 그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모인 자리였다. 명분은 O그룹 3대 독자였던 장 모 씨가 회사를 물려받는 자리. 초청받는 자리라 명단에 없으면 칼같이 돌려보내는 곳이었다. 입장 기다리는 동안 이제노 팔뚝에 기댄 채로 멍하니 다른 생각을 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각별한 사이처럼 굴어야 한다는 말에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어서 그냥 뇌 비우고 ‘진짜’ 와이프처럼 구는 중이었다. 나재민이 보면 엄청 웃을 테지.

“3시 방향.”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적당히 취하면 5시 방향에 있는 테라스로 데리고 갈 거야. 내가 데리고 가면 앞에서 오는 사람 막아줘.”

“혼자 처리할 수 있어?”

“네가 막아주면.”

약을 가진 놈 하나와 유통책 하나, 그리고 그 약을 받을 사람 하나. 김여주 눈에 들어온 사람은 셋이었다. 사진 속 본 얼굴과 다를 거 하나 없이 똑같은 얼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인 김여주가 방긋 웃으며 시시콜콜한 얘기에 의미 없는 말 한마디씩 얹는 동안 이제노가 접근했다. 결혼한 지 3개월밖에 안 됐다고요? 너무 좋을 때다. 방긋 웃으면서 얘기하는 이름 모를 여자의 장단에 맞춰주기만 했다.

“얼마나 걸려.”

[20분.]

“데리고 갈 때 말해.”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귀에 꽂은 게 보이지 않도록 덮었다. 유통책을 잡는 건 하등 소용이 없으니 김여주가 시선을 끌어야 할 건 그 남자. 약을 받지 못하게 해야 했다. 와인을 마시는 척 주변을 둘러보며 남자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건 고개를 돌리며 이제노가 생포하러 간 남자를 찾는 얼굴이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걸 보고 알았다. 돈도 벌 만큼 버신 분이 굳이 이런 일을 도맡아 하시네.

“묶어두고 있을 테니까 빠르게 처리해.”

[이상한 거 안 받아먹게 조심하고.]

“내가 뭐 주는 거 다 받아먹는 애인 줄 아냐고.”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엑스터시 유통량의 근원이었다. 불법적인 경로로 들여오는 사람들을 다 추적할 순 없으니 뿌리를 뽑아야겠단 생각으로 들어선 곳.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 김여주가 부러 관심 있을 법한 주제를 건네 말을 걸었다. 사람들 사이를 둘러보던 남자가 김여주를 발견하고 방긋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주변으로 다가오는 이상한 놈들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번에 처음 오게 돼서요.”

“이름이?”

“명함 드릴게요.”

만들어진 신분을 위한 만들어진 명함을 내밀었다. 유심히 지켜보던 남자가 테이블 위에 뚜껑이 열린 채로 있던 와인을 김여주 잔에 따라주었다.

“마실래요?”

“저는 이미 한 잔 마셨어요. 과음하면 남편이 싫어해서.”

“맛만 보는 걸로 족해요. 우리가 여성분들 타깃으로 만든 건데,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서.”

남자 몸집이 커서 김여주 시야가 가려졌다. 계속 주시하고 있던 움직임도 당연히 가려졌고, 김여주가 살짝 뒤로 물러설 때마다 남자도 함께 김여주 쪽으로 다가오는 게 꼭 목적을 눈치채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무슨 문제라도? 살짝 기울인 고개를 따라 몸을 기울인 남자가 살짝 웃었다. 서늘한 얼굴이 김여주 앞을 가린다.

“제가 드리는 호의인데.”

“…….”

“받아주지 않으실 건가요?”

시야를 가리려는 움직임이 분명했다. 남자가 가까이 있어서 이제노한테 말을 걸 수도 없었고, 어떤 게 들어있을지 모르는 와인 잔에 있는 걸 마실 수도 없었다. 여차하면 남자를 기절시키고 합류할 생각으로 독을 묻힌 침을 넣어둔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생포는 개뿔. 눈 마주치면 잡아다 죽여야 할 것 같구만.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탁해진 눈이 김여주를 집요하게 훑었다.

“죄송한데, 일이 있어서 좀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 남편분이 있으셨구나.”

2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김여주 허리를 커다란 손바닥이 자연스레 휘감았다. 딱 붙은 몸이 살짝 뜨거운 걸 보니 열을 내고 온 거 같았다. 죽였나. 당황한 얼굴 드러내는 법 없이 방긋 웃은 김여주가 이제노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배시시 웃었다. 네에. 남편이랑 같이 왔어요. 애초에 목적이 뚜렷한 접근이었기 때문에 이제 볼 일은 없었다. 손에 든 와인 잔을 가지고 간 이제노가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내는 술을 못 합니다.”

“…….”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금방 빨개지는 편이라서요.”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도수라 드렸습니다. 이건 제 명함이에요.”

명함을 내미는 남자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8시, 유통책과 남자가 만나야 했을 시간이 한참 지난 이후였다. 명함을 받아 든 이제노가 고개를 숙이며 김여주를 이끌었다.

“반지를 빼고 오면 안 되지, 자기야.”

“아.”

“생포는 실패. 저항이 심해서 그냥 죽였어.”

“이런. 나중에 일이 또 생기겠네.”

경력직이 아닌데 경력직인 것처럼 굴라니까 실수를 했다.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김여주가 휑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처리해 둔 게 발견되기 전에 빠르게 벗어나야 했다. 분장용이었던 것들을 벗어 주머니에 넣어뒀던 봉지에 넣은 후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잠깐을 거기 다른 신분으로 살았다고 기가 쭉 빨린 기분이었다. 일상처럼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런 걸 다 견디고 산다고. 한숨 푹 내쉬는 김여주 옆으로 이제노가 바짝 붙어 섰다.

“저 남자랑 무슨 얘기 했어.”

“와인 시음해 달란다. 뚜껑 딴 거 주면서.”

“마셨어?”

“안 마셨지. 죽일까 생각하는데 온 거야 네가. 묶어두는 거 쉽지 않다.”

“김여주라서 성공했네.”

늘상 하는 생각이지만 이제노는 사람을 죽이고 와도 죽인 티가 안 났다. 천성이 이 일에 타고난 건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돌아온 이제노 몸에는 저항했다는 놈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게 김여주가 이제노를 좋아하는 수백 가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을 잘한다는 거. 띨빵하게 구는 놈에겐 없던 관심도 뚝 떨어지는데, 이제노는 빈틈 하나 없이 김여주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남자라 더 문제였다.

“곧 들어가는데 왜.”

“보는 사람 있을 거 같아서.”

“아무도 안 궁금해해.”

향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이가 김여주 어깨 위로 툭 덮였다. 방에 들어가면 어차피 태워버릴 옷이었는데. 평소보다 살이 훨씬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김여주가 기피하기도 했고.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 일부러 가슴 위까지 가리도록 폭 덮어준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김여주는 이제노가 보여주는 일방적인 호의를 멋대로 착각하고 넘겨짚고 싶어질 때가 많아지고 있었다. 점점, 이제노의 손끝에도 김여주와 같은 감정이 묻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의 크기가 커지는 중이었다고. 온기가 담긴 옷깃을 꾹 잡아 당겼다.

“룸서비스 시켜 줄게.”

“나 그냥 잘래.”

“새벽에 나가야 하니까 먹고 자.”

“내일 아침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철푸덕 누워버리는 김여주 뒤로 이제노가 묵묵히 사용했던 것들을 태워버렸다. 일부터 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이 울부짖고 있었으나 김여주는 늘 수면욕이 식욕을 이기는 사람이었다. 잘래. 잘 거야. 피곤해서 잠드는 게 아니라면 제정신으로 이제노랑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건 도피성 숙면이다.

“자기야. 안 씻고 잘 건가.”

“자기라고 그만 불러 이제.”

“너는 한 번도 안 불러줬잖아.”

“너 부를 일이 없었으니까.”

“불공평하네.”

김여주는 이제노한테 불릴 때마다 심장이 땅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자꾸 웃어. 사르르 접히는 눈꼬리를 보면 났던 짜증도 같이 녹아내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반사 작용이었다. 이제노 미래 여자친구는 좋겠다. 이제노한테 매일 저런 말로 불릴 거니까. 드러누운 채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김여주 쪽으로 실내화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며 이제노가 다가왔다.

“안 불러주나.”

“뭐 갑자기, 뭐야.”

“부부 느낌이 안 나잖아.”

“다 끝났는데 왜 난리야 또.”

시야에 하얀 것만 가득했던 김여주 얼굴 앞으로 이제노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김여주 얼굴 옆에 손바닥을 짚은 채로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시야에 이제노가 꽉 차자마자 숨을 들이켠 채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너 뭐, 뭐 해? 이제노 입에서 나온 말로도 충분히 현실인지 기절 잠을 자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데,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왜? 왜? 왜 듣고 싶은 사람처럼 굴지?

“해 봐.”

“……내가 왜?”

“그냥.”

“…….”

“안 돼?”

아 젠장. 이제노는 김여주를 구슬리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축 내려가는 눈꼬리를 본 김여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그냥 침대 눕자마자 자버릴 걸. 이제노 말 듣는 척도 하지 말걸. 입술을 질끈 깨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자기야?”

“응.”

“……됐지? 나 잘 거니까 좀 나와봐.”

“씻어야지.”

“아 싫어어.”

“혼자 못 씻어?”

“뭔 소리야.”

쥐어짜낸 자기야를 들은 이제노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짜증 나게. 김여주는 들은 게 맞는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확인하고, 곱씹고, 자연스럽게 부르는 목소리를 수십 번 재생하고 나서야 꿀꺽 삼켜낼 수 있었는데. 그제야 실실 올라가는 광대가 눈에 들어왔다. 놀릴 의도가 다분했던 걸 알고 나니 괘씸해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으나 이제노가 비켜주질 않아서 그냥 이제노 어깨에 머리만 박은 꼴이 됐다.

“아직도 혼자 씻는 게 무서운 줄 알았지.”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이제 좀 잊으라고 제발.”

“무서우면 내가 씻겨주고.”

“아 싫어!!! 혼자 씻을 거야.”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놀랐던 심장이 쿵쿵 뛰며 머리에 피가 팽팽 도는 느낌이 든다. 상체를 세워 앉은 김여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제노를 쳐다보든 말든, 내일 입고 갈 옷을 꺼내놓는 이제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어째 손바닥에서 단 하루도 벗어나 본 적이 없지. 사람 속도 모르고 저렇게 휘젓는 걸 알고 있는 건지. 잠깐 가까워졌을 때는 아까 이제노가 덮어준 마이보다 더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피비린내 같은 건 어울리지도 않고, 달고 다니지도 않는 남자.

“씻고 나와. 음식은 시켜둘게.”

죽고 싶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로 돌아간 상태였으면 좋겠다. 정말로.

신분 잘 썼습니다. 3개월 사귀고 결혼에 골인 성공한 누구누구 씨. 깔끔하게 업무 성공 후 관련 서류를 태워내는 동안 김여주는 어제 일 때문에 멍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얼굴을 불쑥 들이민 것도 모자라 뭐? 뭐를 불러 보라고?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인데 세간의 화제였던 두 사람이 무사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기는 김여주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괜히 신혼부부를 시킨 게 아니야. 백전백승. 나갔다 하면 필승이세요.”

“그런 식의 축하는 받고 싶지 않아.”

“둘이 잘 어울린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줄 아니.”

연인이나 부부 신분 받고 잠입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고. 유독 김여주랑 이제노한테만 관심이 쏠리는 것도 다 이제노 때문이겠지. 입술 댓발 내밀고 다니는 김여주 앞으로 전략팀 동기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정보통인 만큼 여기저기 소식 잘 듣고 다녀서 김여주가 알고 싶지 않았던 조직 내부의 연애사까지 샅샅이 알게 됐다. 이번 타깃은 김여주인 게 분명하고.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해도 집요한 건 직업 특성이었다.

“안 사귄다.”

“부부면 같은 방 쓴다며. 별일 없었어?”

“……아무 일 없었거든?”

별일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김여주는 가능하면 그 일을 묻어버리고 싶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그 생각 때문에 어지러운데 이제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뚜렷해지는 기분이라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노는 역시나 놀릴 작정이었던 건지 일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김여주한테 전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전이나 지금이나 김여주는 이제노 관련된 질문 받을 때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하기 바쁜 와중 이제노는 잔잔하게 웃으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똑같았다.

“이제노는 자꾸 찌르다 보면 알아서 수긍할 거 같더라.”

“아무 사이 아닌데 왜 부정을 안 하지?”

“진짜 별일이 없었다고?”

“없었다고. 나 그냥 잠만 잤어. 이제노는 거실에서 자고.”

“어떻게 서방님을 거실에서 재워.”

“우리 집 서방님 아니라서 거실에서 재웠다.”

만약을 가정하더라도 이제노가 김여주를 친구 이상으로 보는 전제는 없어서 좀 슬펐다. 걔는 그냥 원래 그런 애야. 김여주라고 각별하게 구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둘이 어렸을 때 공유한 기억들. 이제노가 언급했던 김여주가 혼자 못 씻는다고 했던 것도 그런 기억들 중 하나였다. 서로라서 알고 있는 것들, 말고는 김여주가 이제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만한 가능성은 1퍼센트도 없었다.

“대답 안 하는 게 네 대답 간 보는 거면?”

“이제노는 나 안 좋아해.”

“확실해? 보통 그렇게 말하면 다 좋아하는 거긴 해.”

“이제노는…….”

“이제노는.”

“일단 나 같은 사람을 안 좋아할걸.”

딱히 어른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디 가서 예쁨받는 귀여운 성격도 아니었다. 적당히 무난하고 적당히 무던해서 사람 안 가리는 타입. 이제노랑 성향이 좀 비슷해서 부딪치는 일도 잦았으나 맞는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제노는 자기 입으로 자기랑 좀 다른 사람이 좋다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그게 아무리 주변 사람이 엮어대고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도 이제노가 휩쓸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사람 일 아무도 모른다.”

“네 미래도 아무도 모르게 해 줘?”

“어이쿠.”

“김여주.”

지겹도록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히죽 웃어 보인 동기가 조용히 옆으로 빠졌다. 나 가볼게. 손 흔들고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하이.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이제노가 김여주 옆에 바짝 붙어 발걸음을 맞췄다. 옷 입은 거 보아하니 보고서 올리고 온 것 같은데. 이제노 옆구리를 팔꿈치로 쭉 밀어내자 방긋 웃는다.

“어디 가는데.”

“점심 먹으러 간다.”

“오늘 메뉴 맛있더라. 같이 먹어.”

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둘 사이를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건넸다. 일하면서 솔직히 서로에게 설렜던 적 있다! 무슨 대학생 술게임도 아니고. 술병 돌아간 건 보이지도 않는데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질문에 김여주는 모두 같은 대답을 했다. 이제노는 딱히 대답하지도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극구 부인하는 김여주를 바라보면서. 기어이 김여주가 그만하라고 귀 막고 도망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노랑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주변 살피는 김여주 앞으로 손가락 딱딱 부딪친 이제노가 숟가락을 건네준다.

“밥 먹어.”

“나 노이로제 걸릴 거 같아.”

“신경 쓰지 마.”

“너는 왜 뭐라 말을 안 해?”

무슨 말을 해도 그냥 개죽이 웃음만 지으면서 허허실실. 이제노가 그렇게 웃고 있으니까 아무 말 없는 거 보니 진짜 뭐가 있구나, 싶어서 달려드는 사람들 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 들이밀면서 김여주한테 달려드는 사람들 반. 환장의 콜라보 덕분에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밥 커다랗게 퍼서 입안으로 집어넣은 김여주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푹 쉬었다.

“옆에서 네가 다 말을 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

“너 혼자 있을 때도! 누가 물어보면 말 안 한다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자꾸 그러니까 오해하잖아.”

사람들도. 나도. 다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웃기만 하니까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줄 알잖아. 나만 너 좋아하는 건데. 입술 잘근 깨문 김여주가 깨작깨작 젓가락으로 반찬을 굴렸다. 희망은 품어봤자 실망의 절댓값만 높일 뿐이었다. 그러니 진작 마음 접고 끝내는 게 나은데 얼굴 맞댈 일이 너무 많아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다음 임무 받았어?”

“응. 근데 혼자 다녀오는 거야 이번에는.”

“조심해. 거기 요즘 말 많아.”

“그래서 지원 받을 거야.”

피곤함을 풀 새도 없이 일이 생겼지만 일하는 만큼 들어오는 돈 덕에 짭짤한 금융 치료는 확실히 됐다. 이번에도 잠입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김여주 혼자 들어가서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 부담은 없었다. 오늘 내일 정리한 뒤 바로 모레 끝. 질질 끌거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 아니면 에너지 사용량도 적어서 훨씬 편했다. 사람들한테 시달리느라 오늘치 사회적 에너지 다 뽑아다 쓴 김여주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자 이제노가 휴지를 뽑아다 김여주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악, 뭐야.”

“입술에 묻힌 건 내일 먹으려고?”

“말을 해 주지. 깜짝 놀랐네.”

“졸려 보인다 너.”

“그것도 그렇고, 지금 기가 좀 빨렸어.”

이제노는 꼭 밥을 먹을 때마다 밥 한 번 먹고 김여주 한 번 보는 걸 반복했다. 잘 먹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먹는 속도가 느렸던 김여주 속도에 맞춰 먹느라 같이 느려진 이제노의 젓가락질을 보며 김여주가 속도를 좀 높였다. 바쁠 텐데 미안. 빨리 먹자.

“천천히 먹어도 돼. 나 일정 없어.”

“훈련 없어? 나 밥 먹고 가서 총 다시 만져야 돼. 고장 난 거 같아.”

“만지다가 또 다치지 말고.”

“걱정도 병이다.”

“붕대 풀었어?”

“응 풀었어. 볼래?”

이런 것쯤이야 어릴 때부터 아무 생각 없이 보여주던 사이라 스스럼이 없었다. 김여주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거 없이 똑같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이제노가 지금 까서 보여준다고 하면 극구 사양할 것 같긴 하다. 옛날 몸이랑 지금 몸이랑은 비교가 안 되게 달라졌으니까. 흉터 없이 깨끗한 어깨를 지그시 쳐다보던 이제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평소에는 몸에 생채기가 나기도 전에 끝내면서, 남들 다 기피한다던 그 일 다녀오고 나선 몸 구석구석 자잘한 상처가 생겼다. 그때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이제노 얼굴을 처음 봤다.

“너도 다치지 마. 붕대 하니까 불편하긴 하더라.”

“불편한 게 문제가 아니지.”

“네네. 제노 아빠님.”

일정 없다던 이제노는 밥을 먹고 나가자마자 호출 받고 달려갔다. 나재민한테 들러 서류 잔뜩 받고 방으로 들어온 김여주가 침대에 철푸덕 누웠다. 눕기만 하면 그 생각이 났다. 이제노가 손바닥을 움직일 때마다 사부작거리는 이불 소리도 크게 들리고, 누가 뒤에서 밀기만 하면 입술이 닿을 거리에서……. 점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김여주가 어릴 때 문 닫고 혼자 씻는 거 무서워했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문 앞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를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면서 하품만 쩍쩍 해댔다. 식곤증이 생겼나. 축축 늘어지는 몸을 똑바로 앉혀놓겠다고 해도 자꾸 기울어진다. 마음만 먹으면 침대로 다이빙할 준비가 된 김여주를 깨우기라도 하듯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퍼뜩 잠이 깼다. 배송 문자도 아니고 덜렁 문 앞이라고 보낸 문자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문고리에서 들린다. 피로 해소에 좋다는 음료랑 온갖 초콜릿, 김여주가 좋아하는 과자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거 뭐야?

먹고 일 열심히 해

낯간지럽게 이런 걸 챙겨주냐 돈으로 줘

내 마음이야

내 마음도 있다는 거 제발 알아주길. 내 마음은 이런 거 받으면 주체를 못 해. 김여주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는 것도 이제노다운데, 피곤한 거 눈치채고 사다 준 것조차 정말 이제노다워서, 그래서 더 좋아지고 있었다. 이만큼 좋아하면 더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왜 갈수록 깊고 넓어지기만 해. 왜 내가 발을 담근 곳은 도무지 얕아지지 않는 건데. 이제노가 사다 준 초콜릿 과자 까득 씹으면서 인증샷 전송했다. 맛있게 먹을게. 받은 호의는 꼭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라,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하는 김여주 머릿속으로 이제노가 보낸 답장이 훅 들어왔다.

예쁘네

많이 먹고 아프지 마

예쁘단 말은 친구 사이 금기어로 지정해야 한다. 평소에는 이런 인증샷에 반응도 안 하고 맛있게 먹으라는 말만 하더니. 처음으로 이제노한테 예쁘단 말을 들어본 김여주 심장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뛰었다. 말도 안 돼. 저번에 파티장에서 먹었던 와인을 이제노도 마셨던가? 거기 뭐 들어있었던 거 아니야? 이제노에게서 온 문자를 수십 번 더 확인했지만 같은 내용이었다. 뭐라 답장할지 고민하겠다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고맙다는 말만 남겼다. 이미 승자가 정해진 내기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기 있나.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한 결론은 겨우 그거였다. 김여주가 술 취한 날, 주제 파악 못 하고 이제노한테 덥석 던진 내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거 이기겠다고 이러는 거. 근데 난 네가 이러지 않아도 너 좋아해. 그래서 나는 너 평생 못 이겨 제노야. 숨을 참아냈다가 한 번에 뱉어낸 김여주가 핸드폰을 덮었다.

바쁠 시즌이랄 게 없는 직업이었지만 김여주는 저번 주부터 몰아치는 일을 처리하느라 진땀 쫄쫄 빼는 중이었다. 쉬는 날 뚜렷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터라 최근 김여주는 자는 시간 줄여가면서 눈알 빠지도록 일 중이었다. 일 중독자로 살고 싶은 마음도 딱히 없었는데 굴러들어오는 일복이 이렇게 많아서야.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뿐만 아니라 밖에 나가서 굴러야 하는 일도 있어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노 신경 쓸 수가 있나. 당연히 없지. 20분 쉬는 시간 생겨서 잠깐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드는 바람에 20분이 2시간이 되어버린 이후로 김여주는 오늘 두 배로 더 바빠졌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사람 얼굴 보고 놀란 거야 지금?”

“거울 안 봤어?”

“몰라. 거울 볼 시간도 없어…….”

밥 먹을 시간은 사치였으나 이렇게라도 좀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내려왔다. 거진 며칠 만에 김여주 얼굴 처음 보는 동기가 입 떡 벌린 채 앞에 앉았다. 요즘 진전 없냐고 물어보는 친구 말이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쑥 빠져나갔다. 진전이고 나발이고 잠이나 자고 싶다. 김여주가 이렇게 바쁘면 이제노도 바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주기적으로 김여주한테 연락이 왔다. 밥은 먹고 해? 일을 하다가 늦게 답장하면 한 3시간 정도 있다가 또 연락이 왔다. 다음 주는 밥 먹자. 알겠다고 답했건만 다음 주가 이번 주가 된 현재, 이제노가 더 바빠진 탓에 얼굴 볼 시간이 없었다.

“나 오늘 사람 잡으러 가야 해.”

“오늘도?”

“어어.”

저번에도 겪어봤지만 생포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뒤 구린 놈들은 이상한 놈이 찾아오기만 해도 발작을 일으키며 도망가거나, 아니면 등 뒤에 달린 놈들 우르르 보내서 귀찮게 하거나 둘 중 하나니까. 차라리 죽이라고 하면 깔끔하게 처리하고 나올 수 있었건만 달린 놈들 처리하고 기절시켜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는 건 정말 일이었다.

“같이 가줄까?”

“현장 뛰는 전략팀이 어딨어.”

“잠입 안 해?”

“그냥 문 박차고 들어가는 거지.”

신혼부부 신분을 받았던 개꿀잼 콘텐츠를 옆에서 지켜본 동기가 잠입에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략팀 인재를 뺏으려고 했던 김여주 의견은 당연히 묵살당했다. 아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멍한 얼굴로 기계적인 숟가락질만 하고 있던 와중, 테이블 진동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붙잡았다.

(사진)

어디 봐 ㅋㅋ

도촬당한 김여주 얼굴이 너무 바보 같이 나와서 인상을 팍 썼다. 남의 사진을 왜 마음대로 찍으세요. 눈 가늘게 뜬 채로 고개 돌려 웃고 있는 이제노랑 눈을 마주쳤다. 밥 다 먹었으면 올라가지 왜 거기 앉아 있어. 혼이 쏙 빨렸는데 밥 들어가니까 졸려서 그런다 왜. 텀 없이 주고받는 연락은 오랜만이었다. 그때 이후로 같이 일할 시간도 없고. 내기 내용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다른 곳에 시선 돌릴 틈이 없었다. 오랜만에 본 얼굴에 살이 많이 빠진 걸 보아하니 이제노도 장난 아니게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깐.”

“나 바로 나가야 해.”

“응 그전에 잠깐만.”

“뭔데?”

하품 크게 하면서 올라가려는 김여주 팔뚝 붙잡은 이제노가 김여주 손에 네잎클로버 말린 걸 쥐여줬다. 이런 걸 믿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초록색을 꼭 쥐었다. 한 번도 준 적 없었던 류의 선물이었다. 곧 죽어도 실용성 따지는 남자가 왜.

“다치지 말라고 주는 거야.”

“어디서 찾았어?”

“비밀.”

“안 그렇게 생겨선.”

이 작은 풀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말을 누구보다 믿지 않을 것처럼 생긴 남자가 주는 행운 상징템. 또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받아서 핸드폰 케이스 안에 끼워뒀다. 다치는 거 어쩔 수 없는 직업이고, 그걸 일상처럼 여기는 게 당연해진 곳에서 다치지 말라는 말을 하며 네잎클로버를 내미는 건…… 이건 솔직히 반칙. 이제노의 이런 모습은 가끔 김여주만을 향할 때가 있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헷갈려야 했다.

“조심해.”

“이런 일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식은 죽 먹기지.”

“그러다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

“꼽주지 마라.”

“걱정하는 거야.”

짜증. 바보처럼 웃는 얼굴에 손을 흔들어준 김여주가 방으로 올라왔다. 오늘은 제발 정시 퇴근 부탁드립니다. 잠이 부족한 탓인지 자꾸 멍을 때리게 되는 것도, 그러다 꾸벅 졸게 되는 것도 김여주 의지대로 조절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꼭 일찍 해치우고 집 와서 잔다.

플래그란 플래그는 다 세워뒀으므로 김여주 하루가 평탄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유추할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하지도 않을 실수를 연달아 해버리는 바람에 완전히 어그러졌다. 좀 큰 프로젝트에선 생채기 하나 달고 들어오는 법 없던 김여주가 작은 프로젝트에서 실수를 하는 거, 정말 프로답지 않은 일인데. 넉넉하게 가져간 줄 알았던 총알이 바닥났고,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몸 부딪쳐 싸운 탓에 체력 소모가 심했다. 생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한 발을 남자 허벅지에 박아넣고 아파하는 놈 뒷자리에 태워다가 데리고 오는 것까진 성공했다. 뒤에 따라오는 놈들 따돌리는 것도 성공했다.

“지금 복귀 중.”

[고생했어. 저녁 안 먹었지?]

이제노한테 걸려 온 전화 받으면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정신 없이 빠져나오느라 김여주가 신경 쓰지 못한 건, 남자가 말이 없었던 게 기절한 게 아니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거다. 눈꺼풀 뒤집어가며 확인했어야 했는데 미숙했던 탓이었다.

움직이지 마.

김여주가 억울한 건 정말 본부 들어가기 직전에 당했다는 거다. 하필 그때 차 앞에 붙여둔 본인 확인 장치가 작동을 안 해서. 직접 창문 내리고 얼굴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라 침착하게 창문 내렸는데, 뒤에 누워 있던 남자가 다짜고짜 칼을 꺼내서 김여주 목에 들이밀었다. 총 치워! 안 그럼 그어버릴 거야! 칼에 찔리는 것쯤이야 무섭지도 않았던 김여주가 마음만 먹으면 남자 기절시키는 건 금방이었다. 근데 문제는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던 상태였고, 자꾸 머리가 멍해지는 바람에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제때 떠오르지 않았다는 거다.

“잘하는 짓이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내가 너한테 다치지 말라고 한 게 5시간 전이야.”

“누가 다치고 싶었나…….”

머리가 안 돌아가면 몸이 고생하는 수밖에 없다. 턱 밑으로 자꾸 들이미는 칼을 그냥 맨손으로 덥석 잡은 뒤 몸을 돌려 남자의 뒷목을 내리쳤다. 제 기능도 못하는 허벅지 질질 끌고 일어나 김여주 협박한 용기는 가상한데, 김여주는 안 되면 무모하게 굴어서라도 한 번 받은 작전은 성공시키는 사람이었다. 하여튼 이제노 언어로 정말 ‘무모’하고 ‘멍청’하게 대응한 덕에 손바닥이 다쳤다.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다치는 건 흔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제노는 붕대 대충 감고 들어온 김여주를 보자마자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이럴 거면 현장 나가지 마.”

“내가 팀장인데 어떻게 안 나가.”

“이런 자잘한 일은 팀원들 좀 시키지.”

“팀원들도 바빠.”

의무실 가서 받으면 되는데, 생포한 남자 넘겨주자마자 이제노한테 손목이 붙잡혀서 침대에 앉게 됐다. 굳이 해 줄 필요 없는데도 이제노는 구급상자 들고 와서 정성스럽게 김여주 상처에 약도 발라줬다. 앗 따가. 인상 찡그리는 김여주 얼굴 따라서 같이 구겨진 얼굴이 김여주 허벅지를 아프게 꼬집었다.

“이 정도 다친 거면 양반이지. 이제노가 준 네잎클로버 덕분이다.”

“피가 이만큼이나 났는데 뭐가 양반이야.”

“너 근데 일 안 해?”

“퇴근했습니다.”

“퇴근했는데 누가 직장 동료 손바닥을 치료해 줘. 얼렁 퇴근하시죠.”

상처가 꽤 크게 나서 약을 바르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붕대를 감으면서도 혹시나 아플 정도로 세게 조일까 봐 계속 김여주한테 물어보면서 감았다. 의무실 가면 3분 안에 해 줄 걸 이제노가 굳이 해 주겠다고 나서서 12분째 이러고 앉아 있었다. 상처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김여주한테 타박도 주고, 잔소리도 하고, 주절주절 말도 하고, 상처에 바른 약 마를 때까지 후후 불어주고. 지극정성으로 살피는 이제노 머리통을 꾹 밀어냈지만 밀리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 신경을 써 줘.

“과해.”

“뭐가.”

“너, 이제노.”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지극정성. 그럼 김여주는 나중에 이제노 옆에 있을 여자한테 할 질투할 일만 점점 더 늘어나는 거란 말이야. 이제노가 해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차지도 않으면 어떡해. 이미 눈이란 눈은 다 높여놓고, 죄다, 너 아니면 관심도 안 가게 해놓고 매번 이렇게 내가 오해할 만한 것들만 한가득 들어서 내 품에다 던져주지.

“직장 동료 챙겨주는 게 너무 과하세요.”

“이렇게 다칠 일이 아니었으니까.”

“안 다치고 싶었다고오. 그만 뭐라 해요 진짜.”

“안 아파?”

“아파.”

“……하.”

김여주 앞에 쭈그려 앉은 이제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붕대 위에 테이프를 붙이겠다고 손바닥을 꾹 누르는데, 눈앞에서 잠깐 지옥 입구를 보고 다시 돌아왔다. 너 장난해? 눈 삐딱하게 뜨고 쳐다보는 얼굴에다 침이라도 뱉어볼 기세로 씩씩댔지만,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얼굴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친 건 난데 유난도 자기가 떨어. 뭐…… 뭐 되는 것도 아니구. 꿍얼대는 목소리 뒤에 깔린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일부러 더 틱틱대는 것도 있었다. 대답도 없이 가지고 온 구급상자 정리한 이제노가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덥석, 부여잡는다.

“느 증는흐느. (너 장난하냐.)”

“또 이렇게 다칠 것 같으면 나랑 같이 나가 차라리.”

“느 흔즈스드 흘 스 읐으.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그렇게 고집부리니까 매번 이렇게 다치는 거 아니야.”

잡혔던 입술이 얼얼했다. 혀를 쯧, 차면서 김여주 테이블 위에 구급상자 올려둔 이제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노가 앉으면서 푹 꺼진 침대로 김여주 몸이 기울어지는 걸 그대로 내버려 뒀는데, 이제노는 또 밀어내는 기색 없이 순순히 몸을 붙이도록 뒀다. 붕대 예쁘게 감아둔 손바닥을 빤히 쳐다보면서 만지작거리길래 손을 꼼지락대자 힘을 줘서 잡는다.

“또 2주는 가겠네. 흉터 사라지려면.”

“한두 번 보는 것두 아니고.”

“이럴 때마다 늘 속상했어. 오늘만 이런 거 아니야.”

“……참나.”

속상한 게 얼굴에서 티가 팍팍 났다. 웬만해선 얼굴에 속내 잘 드러내지도 않던 놈이.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이제노는 늘 사소하게 김여주를 챙겼다. 이제노만 아는 것들이 있다는 이유로. 김여주는 늘 시선 끝에 이제노가 머문다고 해도, 이제노는 내내 김여주만 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일 생겼다 하면 귀신 같이 튀어나오곤 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또 언제 나가.”

“이 정도야 총 잡는 데 아무 문제 없어.”

“적어도 일주일은 쉬어. 나가야 하는 임무 있으면 나한테 넘기고.”

“너 일 많아서 살 빠진 게 눈에 보이는데 너한테 넘기라고?”

“응.”

“절대 불가.”

친구 사이로 정의한 건 우리 둘 다 합의한 내용인데,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게 좀 싫었어 제노야. 태생부터 다정하고 섬세한 놈이 주는 달콤한 것들만 받아먹다가 다른 사람 좋아하라고 하면 못 하겠다고. 다른 사람이 이제노를 좋아하는 이유에 이제노의 타고난 다정함이 한몫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제노가 가진 다정이 오로지 김여주만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근데, 김여주도, 김여주만 알고 있는 것들을 내세워 자꾸 이제노 옆에 더 가까이 붙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우월감을 느끼면서.

“이제노.”

“응.”

“우리 내기 중인 거 안 잊었지.”

“당연하지.”

틈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이제노가 보여주는 행동들에는 허점투성이였다. 친구라면서, 동료라면서 이런 것까지 왜 챙겨줘. 꼬리를 물고 늘어질 건덕지를 자꾸 보여주는데 김여주는 묻고 싶지 않았다. 확인 사살 당하는 것보다 마음 아픈 건 없으니까, 착각하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착각하다 조용히 마음 접는 걸로.

“이기고 싶은가 봐. 여지를 팍팍 주네 요즘.”

“이게 여지를 주는 거야?”

“어. 완전. 너 어디 가서 다른 사람한테 이런 행동 해 봐. 바로 좋아한단 소리 나오지.”

마음을 숨기기 위해 하는 말들은 가끔 더 큰 공격으로 되돌아올 때가 있었다. 속에 있는 거 보여줄 수 없으니까 보려고 하지 마.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게 꽁꽁 싸맨 말들만 이제노한테 내뱉었다.

“내기 때문에 너한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래. 제노는 원래 다정하니까.”

“원래 다정한 게 어딨어.”

“…….”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이유가 없는 다정은 성격이라고 하지만 이유가 있는 다정은 목적이 붙는다. 붕대 칭칭 감긴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김여주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뭐라고? 피곤해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여기 오기까지 일이 너무 많았어서, 셧다운 내려버린 머릿속이 자기 멋대로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건 줄만 알았다.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던 이제노가 김여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묘해진다.

“근데 너는.”

잔잔한 목소리와 짙은 속눈썹. 가라앉은 시선은 김여주의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붕대 감은 손등 위에 이제노 손바닥이 닿았다. 머릿속에서 빨간 불빛이 웅웅 돌아가는데도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와 다를 거 없는 상황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김여주 위로 무작정 얼굴을 들이밀었던 그날. 마찬가지로 김여주는 지금도 이제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 저 입에서 나올지 몰라서 더.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여지로 보이지 않나 봐.”

“……어?”

“좋아한다는 말을 안 해 주네.”

그냥 내기처럼 보이나. 방싯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어깨를 밀쳐냈다. 이번에도 순순히 밀려난 이제노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굴까지 열이 화르륵 올라온 김여주가 멍하니 앉아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때, 구급상자 들고 문으로 걸어간 이제노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어떤 게 너한테 잘 먹히는지 알겠다 이제.”

뭐라서 잘 먹히고 이런 것보단, 그냥, 이제노라서 그런 거지. 타격감이 좋은 것도, 김여주가 말 한마디에 쩔쩔매는 것도 다 이제노라서 그런 거라고. 혼자 남은 김여주가 넋 놓은 채로 방금 들었던 말을 계속 곱씹었다. 아무리 씹고 뜯어도 김여주 귀로 들은 말이 맞는지 분간이 안 됐다. 이제노, 설마, 설마? 의구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제야 애지중지 치료를 받은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욱신거리는 손바닥을 허공에 휘휘 쥐어가며 입술을 깨문 김여주가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미쳤나.”

괜히 기대했다가 두 배로 실망하긴 싫은데, 이제노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눈빛만 봐도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사이에 방금 이제노가 보여준 얼굴은 장난이나 거짓 따위가 아니었다. 그럼 그건 무슨 감정을 담은 눈인데? 암만 김여주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없음 의식하기 없음 곱씹기 없음, 삼엑스 되뇌어도 계속 생각이 나는 건 불가항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욕심 내지 말자고 속으로 꾸역꾸역 삼켜낸 걸 무의미하게 만드는 얼굴로, 그런 말을 남겨두고 아무렇지 않게 가버리면 어떡해. 김여주가 폭신한 침대를 주먹으로 콩콩 내리쳤다. 착각이고 오해라면 당장 해명이나 해 줬으면 좋겠다. 이러다 정말, 이제노도 김여주 좋아하는 거라는 상상에 단단히 빠질 것 같으니까.

FILE 0423: 네 사랑은 최소한의 숨 (2)

김여주는 도끼병이 아니다. 나서서 혼자 김칫국 벌컥 들이켜고 상대한테 성을 내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 말은 그러니까. 이제노가, 김여주가 하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지고 사는 건 아닐 거기 때문에, 아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결론만 말하자면, 이제노 행동이 달라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김여주에게 새로운 잠입 파트너가 생겼다. 이제노가 다른 업무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팀의 팀원이 김여주 이름 옆에 적히게 됐다. 같은 특수팀이면서 이제노 말고는 얼굴 본 적도 없는 김여주한텐 조금 낯선 사람이었으나, 친화력 좋은 남자 덕분에 금방 친해졌다. 이런 일은 무조건 이제노랑 합을 맞추던 게 일상이라 새로운 사람이 김여주랑 일을 하게 됐다는 소문이 잔잔하게 돌았다. 이제노만큼 파급력이 크진 않았지만 이제노와 엮인 사람의 일이니 이것 또한 복도 지나다니면서 수없이 들어야 했다.

“바쁘다면서 왜 자꾸 찾아와.”

저번 업무 나갔을 때 썼던 총이 영 상태가 불량이라 주저앉아서 고치는 중이었다. 뭐가 문젠지도 몰라서 냅다 고치고 있었는데,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이제노가 김여주 사무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쉬는 날이었던 김여주가 번듯하게 차려입은 이제노를 보고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자기. 웬. 정장을. 나갈 일도 없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굳이 굳이 차려입을 이유는 또 뭐람. 부족한 곳 없이 어깨선에 딱 맞는 셔츠를 쭉 훑은 김여주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떤 게 잘 먹히는지 알겠다는 게 진짜였나.

“들었어.”

“땡땡이치네. 팀장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나간다며.”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비스듬히 문에 기대 서서 김여주가 조물락대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내리 깐 눈이 김여주 얼굴로 향한다. 혹시 이제노랑 헤어졌어? 단지 잠입 파트너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김여주는 이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어야 했다. 애초에 사귄 적도 없어서 헤어질 수가 없어요 우리는. 고개를 저을 수도, 끄덕일 수도 없는 질문들에 김여주는 한숨만 푹 쉬었다. 그렇고 그런 사이는 내가 되고 싶은 거고, 이제노는 어떤 마음일지 갈피가 안 잡히는 상태라 함부로 단언할 수 없었다.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총을 만져.”

“이거 얼른 고쳐야 해. 내가 젤 아끼는 거란 말야.”

“손바닥 봐봐.”

“너 일 안 해?”

“잠깐이면 되니까.”

총구를 만지작거리는 김여주 손목을 잡고 훅 가져간다. 아야야. 밴드를 붙여놓긴 했으나 이번 상처는 아무는 속도가 좀 더뎠다. 그래서 손을 못 쓰는 상황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눈치챈 이제노 미간이 확 구겨진다. 뒤이어 들려올 잔소리를 예상한 김여주가 눈을 질끈 감자, 이제노가 잡은 손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잠만. 어루만져?

“너 뭐, 뭐 하는데.”

“이번에는 잘 안 낫네.”

“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금방 나을 거야.”

“줘. 내가 해 줄게.”

며칠 동안 이제노도 아마 지겹도록 김여주 이름을 들었을 거다. 반응은 전과 다를 거 없다고 했지만. 이제노는 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응답. 그게 사람들이 멋대로 판단할 건덕지를 준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말 얹지 않았다. 김여주 손에 들린 총을 가지고 간 이제노가 김여주 옆에 철푸덕 앉았다. 책상 놔두고 왜 바닥에서 해.

“바닥에서 하는 게 더 잘돼. 너 근데 일 안 하냐니까.”

“잠깐 쉬러 온 거야.”

“쉬는 게 아니잖아 이러면.”

“왜 다른 사람이랑 하겠다고 했어. 나랑 한다고 하지.”

사실 이런 업무는 유구하게 이제노랑 맞춰왔기 때문에 이제노랑 하는 게 제일 편하긴 했다. 말로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탁탁. 그게 실전에선 얼마나 편한지 직접 해 봐야 안다. 김여주도 이제노랑 하고 싶었지. 근데 이제노는 이미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꽤 큰 프로젝트라 멋대로 빼 올 수도 없었고, 안 그래도 일 몰려서 고생하는 애 어깨에다 또 일을 얹어줄 순 없으니까.

“이제노가 품절남이라서.”

“할게, 너랑.”

“아니 됐다. 이미 보고 다 올렸는데 무슨.”

“그 사람이랑 친해?”

“난 이번에 처음 봤다니까.”

친해지려고 노력 중. 이제노랑 사뭇 다른 이미지의 남자는 적어도 같이 있으면 불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랑 잠입 근무를 해야 하는 건 좀 고역이었지만 어쨌든. 하라면 해야지. 돈이 들어오는데. 덜그럭 소리를 내며 총 만지는 이제노를 가만히 쳐다봤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에 돋은 힘줄로 무의식이 시선을 돌렸으나 허벅지 꼬집어가면서 버텼다.

“이런 거 좋아해?”

“……어?”

“봤잖아. 방금.”

뭘 봐? 토끼 눈을 뜨고 오리발부터 내밀었다. 안 봤는데? 눈 동그랗게 뜬 얼굴을 보고 픽 웃은 이제노가 부러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때부터 뭔가 범상치 않았다. 이 일 하면서 생기는 가장 큰 특징은 눈치가 빨라진다는 거. 눈치로 밥 벌어 먹고사는 직업에서 눈치가 없으면 모가지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묘한 기류를 눈치챈 김여주가 쿵쿵, 자기주장 강하게 하기 시작한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여기만 만져주면 돼. 자. 이제 될 거야.”

“일 많은 애한테 또 일 시켜서 미안.”

“내가 하겠다고 한 건데.”

“땡큐.”

“……김여주.”

덥지도 않은데 붉어진 얼굴이 보일까 봐 머리카락을 죽죽 내려서 얼굴을 가렸다. 멋대로 팔뚝 쳐다보다 걸린 것도 어이가 없는데 왜 소매를 걷어 올리시는데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김여주가 수많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중이었다. 그냥. 그냥 더워서 그런 거겠지. 회피인지 합리화인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며 받은 총을 허벅지에 끼우는 김여주 머리칼을 손등으로 살짝 치워낸 이제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꾸 보는 사람 생각 안 하고 얼굴부터 가져다 대는 거 진짜 선을 자꾸 넘네.

“너무 친해지지 마. 그 사람이랑.”

“같은 회사 사람끼리 친해지면 좋지…… 근데 왜, 너 왜.”

“그 자리 원래 내 거였는데.”

“…….”

“뺏기는 거 진짜 순식간이네. 긴장해야겠다.”

김여주 머리 위로 물음표가 수십 개 정도 올라온다. 얼굴 가리겠다고 내린 머리칼을 굳이 젖혀서 김여주 얼굴을 보겠다고 들이민 얼굴이나, 이제노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나 죄다 김여주 머리통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왜 자꾸 이런 말을 해서 기대하게 만들어. 무턱대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용기가 없었다. 그냥 친구 뺏기는 거 싫으니까. 대충 이런 말로 갈무리하면 김여주는 할 말이 없는 거거든.

“떨어져라 진짜로. 낯간지럽게 왜 이래 요즘.”

“표현 안 하면 모르는 것들이 있더라고.”

“…….”

“난 이런 거 좋아해.”

이제노가 방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빨개진 볼을 톡톡 두드렸다. 미친 거 아니야? 푸드덕 떨어진 김여주가 잔뜩 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이제노를 쳐다보자, 눈꼬리 예쁘게 접은 채로 어깨 들썩이며 웃는다. 아. 반응이 너무. 누구는 지금 속도 뒤집어지고 머리도 헤집어지고 성한 곳이 하나 없는데, 웃어?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하지도 않은 짓을 이제노가 갑자기 고삐 풀린 것처럼 우다다 하기 시작했다. 왜? 이유를 모르는 김여주는 속만 태워 가며 손가락 딱딱 씹어야 했다. 기대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이제노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이 점점 부풀고 있었다. 더 좋아하게 되는 건 덤이고.

그때가 시발점이었다. 이제노는 그때를 기점으로 김여주를 제대로 조져놓을 생각인 건지 뭐만 하면 김여주 보겠다고 찾아와서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다가 갔다. 일 안 바빠? 김여주 물음 깡그리 무시하고 오늘은 어땠는지 그 사람이랑 무슨 일을 했는지, 김여주한테 똑같은 걸 매일 물어보고 답을 듣고 나서야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제노가 요즘 이상해. 뭐를 단단히 잘못 먹은 게 분명하다고.

“여주 씨 이거, 그때 빌려주신 거예요.”

“아아 감사합니다. 내일 나가야 하는데 더 안 써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것보다…….”

새로운 파트너랑 하는 잠입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 주기적으로 회사에 와서 보고를 올려야 했다. 그래서 회사로 돌아올 때마다 이제노가 뽈뽈 김여주 뒤를 쫓아다니곤 했는데, 오늘은 바쁜 건지 김여주가 들어오고 나서도 얼굴 비추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김여주가 먼저 찾으려다가 복도에서 새 파트너를 마주치고 그대로 붙잡혔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저요?”

“네.”

김정우. 번듯하게 적힌 글자를 바라본 김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서글서글하고 고집 없는 성격이라 김여주랑 합 맞추는 거에 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김여주가 나이는 어린데 고참인 걸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같았다. 능력 있는 사람 넘 멋있어요. 따봉 날리면서 웃는 남자도 강아지를 닮아서, 볼 때마다 눈웃음 예쁜 남자 생각이 자꾸 나서 머리통 붙잡는 게 일상이었다.

“저랑 저녁 먹어주세요.”

“네?”

“일 얘기는 아니고, 그냥 여주 씨랑 저녁 먹고 싶어서요. 안 되나요?”

인생에 남자라곤 이제노만 들일 생각으로 살던 김여주한테 생각하지도 못한 남자가 굴러들어왔다.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던 김여주는 당연히 부끄러운 듯 뒷머리 긁으면서 말하는 남자의 의도를 알아챘다. 당장 내일도 같이 일 나가야 하는 사이에 불편한 일 만들어 봤자 좋을 거 없단 생각에 그냥 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김여주 머릿속에서 가장 커다란 지분 차지하고 있는 남자는 따로 있으니까 선만 안 넘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바빠서 그랬어.”

“너 바쁜 거 누가 몰라.”

“내일 저녁 먹으러 갈 거야 그래서?”

열심히 돌아다녀도 이제노가 보이지 않길래 그냥 방으로 들어온 김여주가 씻고 나오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노도 막 씻고 나온 건지 섬유유연제 향기 폴폴 풍기며 김여주 손바닥 보겠다며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내일 정우 씨랑 저녁 먹기로 했어. 손바닥 붙잡힌 김여주가 뱉은 말 듣고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쑥 내려간다. 정우 씨랑? 방금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얼굴이 가라앉은 걸 본 김여주가 시선을 피했다. 왜 얼굴이 안 좋아졌지.

“먹으러 가야지. 일 얘기도 좀 하고.”

“사이 좋네.”

“사이가 좋긴. 관심 있고 뭐 그런 거 아니야.”

점점 작아지는 밴드를 보면서 안심하는 게 눈에 보여서 좀 귀여웠다. 바쁘다더니 머리 자를 새도 없는지 까맣게 덮은 머리칼이 점점 눈꺼풀을 덮고 있었다. 제노야 머리 좀 잘라라. 무의식적으로 머리칼을 넘겨준 김여주 손길 따라 고개를 든 이제노가 잔뜩 쳐진 눈꼬리로 김여주와 눈을 맞췄다.

“내일 나랑 저녁 먹으면 안 돼?”

“내일 약속 있다고 방금 말했잖아.”

“그거 취소하고.”

“먹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취소해.”

“……그치. 그렇겠지.”

아쉬워 보인다. 누가 봐도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미 김여주가 완패한 싸움에서 이제노는 뭘 더 원해서 자꾸 김여주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손바닥 보겠단 말로 커다란 손바닥 안에 김여주 손가락을 가둔 채 꼼지락대는 이제노를 빤히 쳐다봤다. 제노야.

“나 이제 잘 안 다칠 거니까 이렇게 안 챙겨줘도 돼.”

“내가 이렇게 챙겨주는 게 귀찮아?”

“아니 그건 아닌데.”

“나 귀찮아?”

“아니 아니야.”

자꾸 보고 있으면 금방 좋아한다고 말할 거 같아서 그래. 내뱉지 않기로 다짐한 마음 그냥 너한테 말해버릴까 봐. 준비도 없이 튀어 나간 말이 예쁠 리가 없잖아. 목구멍을 빙빙 맴도는 말을 꾸역꾸역 삼킨 김여주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을 꾹 잡아 당기며 자꾸 뒤로 가는 김여주를 옆에다 앉힌 이제노가 김여주 어깨에 머리를 톡, 기댔다.

“피곤하다가도 너랑 얘기 나누면 다 괜찮아지는 거 같아.”

“…….”

“그래서 보러 오는 거야.”

비상. 이제노가 이런 말을 하는 거에 내성은 무슨 면역도 없던 김여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유독 심장을 감싼 부위만 약하고 얕은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심장이 벅차게 뛸 때마다 박동이 이렇게 잘 느껴질 수가 없잖아. 어디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지, 살결 너머로 여실히 느껴질 때면 김여주는 이제노 품에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어졌다. 친구라는 이름은 싹 지워버린 채.

“나, 나중에 너랑 사귈 사람은 좋겠네.”

“……왜?”

“이런, 이런 말 자주 듣고 살 거니까.”

어깨에 묻은 얼굴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서 정전이 된 머릿속에서 억지로 쥐어짜 낸 말이었다. 이번에도 김여주 의도를 숨긴 채 단순히 친구 사이에서 할 법한 말로 포장해서 건넸다. 김여주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너랑 사귀는 사람은 좋겠다.”

“……왜?”

이제노랑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기 때문에, 김여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수많은 장애물에 걸려서 넘어지는 동안, 김여주는 의심 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닐 거라고 회피하고 합리화하며 모난 머릿속에 둥그런 마음 집어넣지 않겠다고 했다. 지레 겁먹은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방어 기제를 허물 수 없도록. 김여주는 이제노 곁에 친구로라도 남아 있고 싶었으니까. 오래 끌고 온 관계인 만큼 이제노는 김여주한테 너무너무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런 얼굴 매번 볼 수 있어서.”

“…….”

“그렇지?”

이제노의 시선이 올곧게 김여주를 향한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여린 살결로 감싸진 곳이 무작정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제노가 하는 말 기저에 깔린 감정이 궁금했다. 만약 김여주랑 같은 감정이라면, 같은 마음으로 눈을 마주하고 있는 거였다면 김여주는 기꺼이 내뱉는 문장의 포장지를 벗겨낼 생각이 있었다.

김여주가 확신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마지막 장애물이자 가장 커다란 관문은 금방 무너졌다. 그것도 가장 바쁘고 가장 정신없을 때. 한 발자국만 넘어가면 확신 속으로 풍덩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이제노는 기다렸다는 듯 김여주 손바닥에 도장을 쾅 찍어줬다. 수백 밤을 짝사랑이라 생각하며 이제노가 하는 의미 가득한 행동을 몇 번이나 부정하고 부인했던 게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진 순간. 내기의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

“오늘 아침 이제노의 나체를 보고 오셨다고?”

“아 뭔 소리야!!!”

정확히 말하면 아침에 옷 갈아입고 있는 이제노 방문을 열고 들어간 거다 김여주가. 그럴 의도 하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들어오라고 해서 그냥 들어갔다. 웃통을 벗고 있을 줄은 몰랐지. 다행인 건지 바지는 입고 있었으나 벌거벗은 이제노 몸통을 봐버린 김여주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왔어? 웃으면서 물어보는 얼굴도 눈에 안 들어왔다. 지금 내가 네 몸을 봤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그대로 문 닫고 도망쳤다. 오늘 잠입 마지막 날이라 끝나고 저녁 먹자고 말하려다가 된통 당하고 왔다.

“이제노가 강수를 뒀네.”

“덥다. 문 좀 열고 살아줄래?”

“아까 환기했다가 닫은 거야. 더우면 너도 시원하게 위에 벗고 다녀.”

“미친.”

당장 3시간 뒤 임무 나가야 하는데 눈앞이 핑핑 돌았다. 눈 감았다 뜨면 살구색 몸이 보이는 것 같아서 더 미칠 지경. 오랜 시간 붙어 있으면서 못 볼 꼴 다 봤다고 하지만 이런 건 보여주지 않았다. 내외 없이 지낼 나이에도 둘 사이에 이런 건 좀 칼같이 지켰으니까. 암만 그래도 여자애랑 남자애가 한 욕조 안에서 같이 씻거나, 덥다는 핑계로 웃통 홀라당 까고 드러눕지 않았으니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직업 상 당연히, 정말 당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는 근육들이 눈에 한 번 들어온 걸로 각인이 된 건지 자꾸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침 떨어지겠다.”

“나 오늘 일할 수 있을까.”

“잘 마무리하고 와야 그거 한 번 만져보고 죽지.”

“그걸 지금 격려라고 해?”

“조만간 좋은 소식 들리겠다.”

“어디 가서 말하지 마.”

“어엉~”

당황한 마음을 어디다 풀어낼 수가 없어서 정보통 동기를 찾아오긴 했지만 진정이 되고 나니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아 좀 후회했다. 한숨 푹 내쉰 김여주가 드러누운 채로 천장만 멍하니 응시했다. 김정우랑 하는 마지막 잠입 업무가 끝나면 김여주는 장장 2주 동안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휴가를 갖게 된다. 어디 나갔다 오라는데 이제노가 여기 있는 이상 김여주는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었다.

“정우 씨랑 같이 안 가?”

“그런 컨셉 아니야 이번에는.”

동향 지켜보겠다고 그 더러운 곳에 들어가서 역겨운 얼굴 보느라 고생 좀 했다. 보통 잠입이라면 둘이 함께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김여주랑 김정우가 서로 일면식도 없는 설정이라 같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여주가 먼저 들어가면, 백업을 김정우가 해 주는 걸로. 이런 일 수도 없이 해 본 사람이 전방에 서는 게 나았다. 허벅지에 총 끼워 넣은 김여주가 흉터 없이 깨끗해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이제노가 매일매일 상태 보면서 지극정성 돌봐준 덕이었다.

왜 도망갔어 ㅋㅋ

오늘 끝난다고 했지

보러 갈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제노가 좀 짜증 났다. 막말로 웃통 벗은 이제노가 김여주한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김여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중인 건 맞았다. 근데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옷 벗고 있으면 어떻게 제정신으로 그걸 보고 있어. 마음은 항상 원하는 대로 흘러가질 않고, 굴러간 곳이 머무를 곳일지 아닐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 바람에 따라잡지도 못하고. 알아챈 이후에는 이미 늦어버린다. 늘.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이제노 앞에서 김여주의 마음은 늘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고.

“안 나가?”

“나가아…….”

“조심해서 다녀오고. 너 또 다치면 이제노 호들갑 떠니까 신경 좀 써.”

“이제노가 호들갑을 떤다고?”

“어어. 너 그 손바닥 다친 것도.”

깊게 찔린 거 아니라서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이제노가 꼬박꼬박 의무실 가서 그거 받아다가 너 보러 간 거야. 이래 놓고 안 사귄다고 발뺌을 해? 솔직히 말해봐.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동기가 어깨 잡고 하는 말이 우다다 쏟아졌으나 김여주는 이번에도 멍하니 서서 손바닥만 바라봤다. 어느 쪽이 이제노가 가진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오래 본 소중한 친구와 또 다른 하나. 어디로 이제노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매번 답답하기만 했다.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심장을 꾹꾹 누르고 동기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야! 너 진짜 뭐 있는 거면 나한테 얘기해!”

보통 이 정도 심증이 모이면 물증 하나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확신을 주는 단 하나의 실체. 눈에 보이지 않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것들은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김여주는 아직도, 여전히, 그 안으로 발을 넣기가 무서웠다. 벨트를 메고 핸들을 잡는 손이 떨렸다. 심장은 늘 뜀박질이 빨라질 때면 그 박동을 주변까지 퍼뜨려서 뭐 하나 삐그덕대지 않는 게 없도록 만든다.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무전기를 귀에 꽂은 김여주가 두 번 두드리자 김정우가 대답했다.

[여주 씨, 출발했어요?]

“저 이제 출발하려고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네.”

김여주는 여기서 의심해야 했다. 같이 임무 나가는 사람이 왜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했는지. 그러나 이제노 덕분에 혼이 쏙 빠진 머릿속에 그런 걸 곱씹을 이성 같은 건 없었다. 무전을 끊은 김여주가 주차장을 나섰다. 이제노한테 온 연락엔 답장도 못 했다. 프로필 사진에 있는 이제노 얼굴 보면 또 그거 생각이 나니까. 과하게 반응하는 거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이제노가 그만큼 김여주한테 큰 사람이니까. 네가 주는 박동은 늘 나한테 이만큼, 아니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파동으로 나를 흔드는 중인데.

변수의 연속이었다. 하나가 터지니 다른 것도 다 우르르 터졌다. 일단 첫 번째, 잠입을 진행하는 동안 철저히 머리 굴려서 짠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두 번째, 계획이 어그러진 대가로 김여주만 전달받지 못한 정보가 있는 의심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세 번째, 그래서 김여주가 첩자인 걸 들켰다. 그래서 결과는.

“억까도 이런 억까가 없다.”

쫓기는 신세가 됐다. 표적은 모습을 감췄고, 그 밑에 있는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 다니면서 김여주 뒤꽁무니를 쫓았다. 숨는 거엔 자신 있었던 김여주도 여기저기 깔린 놈들 눈 피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어떻게든 목표물만 잡아다 죽이면 되는데 도통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아까부터 무전으로 김정우한테 말을 걸고 있지만 건너편에선 들리는 목소리가 없었다. 자고 있거나 농땡이를 피우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이가 빠득 갈렸다. 흉터 없이 깨끗해진 손바닥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여차하면 별 성과 없이 복귀해야 하는데, 그건 진짜 정말 싫었다.

“정우 씨. 내 말 안 들려요?”

묵묵부답인 무전기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귀에서 빼낸 김여주가 숨을 몰아쉬며 골목마다 김여주를 찾는 사람들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딱 하나만 찾으면 된다.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우당탕 작은 소리라도 냈다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총부터 쏴댔다. 김여주는 아직 총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건 반칙이지.

“날이 아니었나 본데.”

“잡아!”

평소 같으면 함정이 있는 것쯤이야 금방 눈치챘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모든 계획이 다 무너진 적은 처음이라 당황한 것도 있었고, 일단 같이 일하는 사람이 지금 연락이 안 된다니까.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던 머릿속이 정리되지 못해 기어이 지뢰를 꾸욱 밟았다. 지뢰는 밟고 발 떼면 안 되는 거 알지. 발 떼고 도망가고 싶었으나 사방에 깔린 게 놈들이라 막다른 길 앞에 선 김여주가 고개를 저었다. 소득이 없는 복귀라니. 김여주 커리어와 자존심에 엄청난 스크래치였다 이건.

“누가 보냈어.”

“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쥐새끼처럼.”

몸을 숨기고 있던 놈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한 건지 모습을 드러냈다. 못생겼는데 살까지 쪄서 역겨움이 두 배. 평생 잘생긴 얼굴만 곁에 두고 살던 김여주는 이런 거에도 면역이 없었다. 이제노 보고 싶다. 상황 불문하고 불쑥 떠오른 생각 덕에 더 머리만 어지러워졌다. 무전기를 발로 지져놓고 와서 다행이지. 추적당할 위험은 없었다. 김여주 하나만 살아 나가면 그만이라는 건데, 이거 오늘따라 통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남자도 있잖아. 그 새끼도 같은 놈들이야?”

“난 모르지.”

“네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두툼한 손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뺨 맞을 거 각오한 김여주가 이를 깍 깨물었으나 볼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목을 틀어쥔 남자가 김여주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봤다. 어차피 얼굴을 뒤덮고 있는 건 분장이라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텐데.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너.”

“그럴 리가.”

허벅지에 있는 총을 꺼내는 게 목표였다. 그러려면 시선을 분산시켜야 하는데. 김여주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동안 남자는 무슨 생각이라도 하듯 계속 김여주 얼굴만 훑어봤다. 너,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남자 머리 위에 있던 철골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남자 주변으로 떨어졌다. 황급히 김여주 앞에서 벗어난 남자 주변으로 먼지가 훅 튀어 오르고, 어디서 떨어진 건지 모를 연막탄이 시야를 가렸다. 연락 안 받으시던 분 드디어 나타나셨나. 재빨리 허벅지에서 총 꺼낸 김여주가 건물 뒤에 몸을 숨겼다. 연막이 사라지면 바로 죽이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김여주 등 뒤에 무언가 툭 닿았다.

“이제 오셨,”

“여주야.”

“……네가 왜.”

연막탄이 금방 걷히고, 총을 가진 남자들이 무작위로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이제노가 김여주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제노가 왜 여기 있는지 어떻게 온 건지 김정우는 어디 간 건지 머릿속에서 온갖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말할 틈도 없었다. 몸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곳이라 금방 위치 들통난 둘 악착같이 쫓아오는 놈들 때문에. 목표물 차로 이동 중. 이제노가 차고 있던 무전기에서 나재민 목소리가 들렸다. 왜? 진짜 이해 안 되는 것들밖에 없었다.

“야 이제노.”

“나중에. 지금은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자.”

이제노가 온 순간부터 일이 쉬워질 거라는 걸 알아서 마음이 편해진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제노의 존재 자체가 컸다. 길 터주면서 가는 이제노 따라 목표물이 타고 있는 차를 쫓아가는 것도, 뒤에 오는 놈들 시선 돌려가며 따돌리는 것도 이런 일만 지독하게 합을 맞춰온 둘이라 자연스레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갖춰 입고 온 이제노를 보며 김여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항상 이런 식으로 내가 필요할 때마다 눈앞에 막 나타나고 그러지. 내가 너를 부를 때마다.

“5시 방향으로 간다. 저격할 수 있겠어?”

“이 정도야.”

몸을 숨긴 김여주가 신호 대기 중인 차를 겨눴다. 딱 깔끔하게 그 사람만 노려야 했다. 이제노가 뒤를 봐주는 동안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숨이 차게 뛰어온 탓에 손이 덜덜 떨렸으나 차분히 호흡했다. 혼자가 아니라서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뭐든 혼자 거뜬히 했었던 김여주였는데. 목표물을 조준하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김여주가 몸을 숨긴 곳을 발견한 놈들이 김여주가 있는 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쨍, 철제가 닿는 소리가 들리면서 이제노가 김여주 어깨를 잡고 그대로 감싸 안았다.

“아!”

방아쇠는 당겨졌고, 총알은 나갔는데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노 품에 안긴 김여주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고,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김여주가 서 있었던 곳이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들이 후두둑 쏟아졌다. 별로 높지도 않은 곳이었고, 떨어지면서 이제노가 김여주 뒤에 있었던 탓에 김여주한텐 아무 충격도 안 느껴졌다. 으하하. 드러누운 이제노가 배시시 웃으면서 김여주를 꼭 끌어안았다. 너 성공했어 여주야.

“죽었어?”

“죽었어.”

다행이다. 몸에 힘이 쭉 빠진 김여주가 그대로 이제노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김여주랑 이제노는 슬금슬금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드러누운 채로 웃기만 하는 이제노 배를 꾹 누른 김여주가 궁금했던 것들을 이제노 위로 우르르 쏟아냈다. 김정우가 아니라 왜 이제노가 여기 있는 건지, 나재민은 알고 이제노를 보내준 건지.

“내가 바꿔 달라고 했어.”

“……뭐?”

“오늘 시간이 좀 남길래.”

“…….”

“이런 건 나랑 해야 하는 거잖아.”

아무래도 일 뺏긴 게 단단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기어이 김정우 자리 꿰차고 들어온 거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라서 김여주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고작 이 일이 뭐라고. 입꼬리 당겨 웃은 이제노가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한 김여주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다친 곳 없다, 이번엔. 정신이 퍼뜩 든 김여주가 황급히 이제노 몸을 돌리려고 했으나 꿈쩍 않고 헤실헤실 웃기만 한다.

“이제노, 너 등 괜찮아?”

“괜찮아.”

“……너.”

“응.”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줘?”

그냥 떨어진 것도 아니고 김여주를 안고 떨어진 거라 충격이 두 배로 컸을 텐데도 이제노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 김여주랑 같이 하겠다고 원래 맡았던 사람 밀어내고 오늘 여기 온 거나, 위험한 상황에 정말 당연하게도 김여주를 감싸고 뛰어내린 거나. 이제노답지 않게 무모하고 멍청한 짓만 골라서 했는데도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좋아서 문제지. 왜 이제노에게 김여주는 이렇게도 각별한 것처럼 구는 건지 알고 싶었다. 김여주랑 다른 마음이라고 할까 봐, 김여주가 가진 마음조차 부정당할까 봐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말의 물꼬를 드디어 오늘 틀었다.

“동기든 친구든.”

“…….”

“이렇게까지 해 주고 싶은 사람은 잘 없지.”

“…….”

“그럼, 나는 너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줄까.”

바보. 아직도 모르나 봐. 멍하니 이제노 손등 붙잡고 있는 김여주 손가락 사이사이로 이제노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애초부터 같은 농도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둘은 다른 성질이라 생각해서 섞이지 않으려고 했던 거지. 김여주가.

“여주야, 나는 애초에 그 내기를 시작할 때.”

“…….”

“너한테 이길 생각이 없었어.”

거짓말. 이 내기에서 패자는 당연히 김여주라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완전한 승리를 네게 안겨줄 순 없을 거라고 술을 마신 그날, 이제노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던 그날 바로 알아챘는데. 김여주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손가락 틈새에 얽힌 손가락이 김여주 손등을 어루만졌다. 술 취해서 하는 말인 거 알고 있었고, 김여주 마음이 이제노 마음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럼 왜 내기 하자고 했을 때 알겠다고 했어.”

“네가 하자고 했으니까.”

“……그게 다야?”

“응. 네가 하자고 해서.”

“거짓말.”

내내 웃음기 매달고 얘기하던 이제노가 바람 빠지게 웃었다. 여주야. 웃을 때마다 들썩이는 가슴팍 따라서 위에 얹어둔 김여주 손도 함께 들썩였다. 김여주 힘이 조금이라도 풀어진다 싶으면 이제노가 꽉 줘서 잡아 오는 덕에 온기가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밖은 시끌벅적한데 여긴 둘만 사는 세상 같고. 김여주는 지금 이제노가 하는 말 외에는 다 들어오지 않았다.

“제노야, 나는 네가…… 네가.”

“소원 들어줄게.”

“…….”

“내가 졌잖아.”

내기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없어, 소원.”

“정말?”

누군가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김여주는 망설임 없이 이제노가 김여주를 좋아하게 해 달라고 빌었을 거란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사람 마음을 변하게 하는 일은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듣고서도, 딱 하루만 이제노가 김여주를 좋아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매일 그렇게 살고 있었던 건 줄도 모르고. 김여주가 제안한 내기에서 이길 생각이 없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김여주는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소원이 이미, 한참 전에, 이루어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주야.”

반강제로 손을 꼭 잡고 시끄러워진 현장에서 멀어졌다. 뒤처리는 둘의 담당이 아니었으니. 성과 없이 돌아가게 될까 봐 마음 졸였던 게 무색하게도 이제노의 등장으로 모든 게 정리됐다. 마주 잡은 손에 맥박이 뛴다. 같은 보폭으로 걷는 발걸음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멀어질 때마다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복귀하겠습니다. 이제노가 무전기를 다시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좋아해.”

“…….”

“아직도 소원이 없어?”

좋아한다는 말을 대신하는 말들은 세상에 널렸다. 어떤 단어를 조합하든 좋아한다는 말을 의도로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제노는 택하지 않은 방법들. 혼란스러워하는 김여주한테 사실 가장 필요한 건 의도를 담은 말이나 수식어가 가득한 미사여구 같은 게 아니었다. 앞뒤에 따라오는 말이 없이도 제일 명확하게 이제노가 가진 마음은 전달하는 법은 모든 포장지를 벗겨낸 날것의 마음을 주는 거였다.

“제노야.”

“다시 말할게.”

“…….”

“좋아해. 좋아했고, 더 좋아할 생각이야. 네가 날 안 받아준다고 해도.”

“…….”

“이래도 소원이 없다고 할 거야?”

이제노 차가 시야에 들어올수록 심장이 쿵쿵, 보폭보다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들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막상 직접 듣고 나니 믿을 수가 없어서 계속 머릿속으로 되묻게 됐다. 정말? 정말 이제노가 나를 좋아해? 나만 이제노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고? 거대하게 느껴지던 장애물들이 하나씩 툭툭 쓰러지기 시작한다. 손을 뻗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었던 김여주 앞으로 불쑥 나타난 얼굴.

“같이 가자.”

“…….”

“네 차는 다른 사람 보고 가지고 오라고 할게.”

“제노야.”

“응.”

“내가 지금 이 차 타면 너 나랑 친구 아닌 거야 이제.”

오랜 시간 지켜온 마음이 변할 거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도 머릿속에서 부정 중인 건지.

“그게 네 소원이야?”

“…….”

“타.”

“…….”

“얼른.”

그제야 꿈처럼 보이던 현실이 손으로 만져지는 것 같았다. 입술 꾹 깨문 김여주가 손잡이를 열고 조수석에 올라타자, 이제노가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여전히 김여주가 사준 것들이 구석구석 그대로 남아 있는 차였다. 굳이 김여주 쪽으로 몸을 기울여 벨트를 당긴 이제노가 열 오른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 조용히 웃었다. 복잡하게 굴러가던 머릿속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자 셔터를 내린 것처럼 둔해졌다. 차 타면 친구 아니라고 마지막 떠보기까지 했는데 이제노는 타라고 부추겼고, 그럼 둘 사이가 쌍방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남은 거라곤…….

“우리 이제 소문 엄청 돌 거야.”

“응 알아.”

“어딜 가나 사람들이 다 물어볼 거야.”

“여자친구라고 할게.”

“……내가 얼마나 오래 너 좋아했는지 알아?”

“알아.”

“……근데 왜……!”

모르는 척했어. 다 알면 진작 확신 좀 줄 것이지. 원망 살짝 섞인 눈초리를 받아낸 이제노가 틈이 없어진 공간으로 손을 훅 뻗었다.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라가 있던 김여주 손등 위를 덮어낸 뒤 자연스레 깍지를 껴서 잡았다. 원래부터 이런 사이였던 것처럼 위화감 하나 없었다. 그게 또 김여주를 한 번 더 바보 만든 꼴이 됐다. 눈치 없으면 못 살아남는 바닥에서 꽤 눈치 없이 굴었었나 내가.

“오늘처럼 이렇게 뛰어들고 싶을까 봐.”

“…….”

“지금도 봐. 네가 정우 씨랑 이런 거 하는 것도 싫어. 마음 주체 못해서 너 곤란하게 만들까 봐 참았어.”

“바보.”

“결국 못 참을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걸. 그치.”

남들 다 호시탐탐 노린다는 놈 좋아하는 일 정말 빡세다, 생각하고 있을 시간에 이제노가 하는 행동 몇 번 더 곱씹어 볼걸. 자연스레 반응하는 방어 기제 덕분에 미루고 부정하고 지워내다가 결국 이제노 입에서 좋아한단 소리 나오게 한 게 좋은 일인지 아쉬운 일인지 모르겠다. 마음을 토할 일이 생긴다면 김여주 쪽이 먼저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스멀스멀 입꼬리가 올라간다. 현실이라는 게 온몸으로 체감되고 나니 멍했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는 것 같았다. 절대 공존할 수 없을 것 같던 이름이 한 문장 안에 같은 마음으로 묶이게 됐다.

“대답해 줘야지 여주야.”

“……뭘?”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

“너도 나 좋아해?”

“진짜 시시하고 진부한 질문이다. 몰라서 물어?”

이제노 손을 꼭 맞잡은 김여주가 이제노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김여주한테 먼저 마음 고백한 이후로 내내 저렇게 웃고 있는 낯이었다. 내기에 진 건 이제노인데 소원이 이루어진 것도 이제노였다. 그러니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얻은 것만 남은 내기였지 이건.

“내가 너한테 시시하고 진부한 걸 물어보는 이유는.”

“…….”

“너한테 그 시시하고 진부한 대답을.”

“…….”

“듣고 싶다는 뜻이야.”

김여주 위로 세상이 툭 떨어진 기분이었다. 모든 걸 손에 쥐여줄 거란 실체 없는 문장이 눈앞에 보인 순간. 빨간불에 멈춰 선 이제노가 김여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둥그런 눈동자가 한없이 떨리는 걸 보면서 대답을 재촉하듯 손등에 볼을 살살 비볐다. 지금 말해줘. 듣고 싶어. 좋아하는 마음의 무게를 따질 수 있다면 김여주가 이제노한테 안겨줄 것도 김여주의 세상과 비슷한 무게라는 걸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좋아해.”

“나도.”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해. 제노야. 정말이야.”

끝끝내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너랑 내가 벽 너머에 서 있던 게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거라서 정말 다행이다. 수백 밤 동안 이제노를 새겨넣는 동안 반대편에서도 김여주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챈 만큼, 그 아쉬웠던 시간보다 더 큰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해. 내기 끝. 김여주가 만들어낸 불씨가 완전히 타오르고 나서 남은 건 그 불씨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김여주가 먼저 시간을 확인한다. 출근해야 하는 시간이라 당장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무거운 게 툭 막고 있어서 멋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노오. 맨살을 착착 때려대자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이제노가 김여주 허리를 잡고 쭉 끌어당겼다. 덕분에 이제노 품으로 다시 끌려간 김여주 귀로 이제노 손바닥이 덮인다. 오늘은 좀 쉬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피로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김여주를 품에 다시 재우려고 했으나.

“일어나라고 이제노.”

“아 아파. 아파.”

“우리 오늘 거기 가야 돼.”

“알지. 어제 늦게 잤는데도 멀쩡하네 너는.”

“멀쩡해 보여? 멀쩡해 보이냐구.”

“응. 다음부턴 좀 더 늦게 자도 되겠다.”

“미쳤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제노는 느릿느릿 몸을 움직였다. 1시간 뒤에 가야 한다고 부산스레 움직이는 김여주를 휙 낚아채 어깨에 얼굴을 폭 파묻는다. 아 이제노오. 붙잡히면 또 순순히 붙잡혀 주면서 힘을 주지도 않고 이제노를 꾹 밀어낸다. 배시시 웃은 이제노가 드러난 목덜미 속 붉은 곳에 입을 쪽 맞췄다. 스스럼없이 이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사실 하루하루가 아직도 꿈 같긴 하다. 김여주한테 등쌀 떠밀려 질질 밖으로 나오게 된 이제노가 먼저 마주친 사람을 보고 김여주 눈치를 슬쩍 봤다.

“왜 안 가.”

“여주 친구.”

“……내 친구?”

“너네 둘이…….”

정보통 동기의 눈에 딱 걸렸다. 같은 방에서 나오는 거. 김여주가 나갔던 일이 아직 정리가 안 돼서 둘 다 바쁜 와중에 사귄다고 공표할 일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입이 싸고 가장 소식 전하는 게 빠른 사람한테 들키다니. 동기의 시선이 드러난 김여주 목덜미로 향하고, 김여주가 황급히 머리카락을 정리해 가려보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너……!”

“진짜 제발 조용히 해 주면 안 될까.”

“야……!”

“나중에 얘기할 테니까 제발. 제발 조용히. 부탁.”

급한 일이 있어서 미안. 이제노 팔뚝 끌고 벗어났으나 동기한테 들킨 이상 소문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팔 붙잡혀서 끌려가는 와중에도 머리카락 흩날릴 때마다 보이는 것들을 눈에 담던 이제노가 불쑥, 김여주 뒤통수에다 대고 말을 툭 던졌다.

“잘 보여서 어떡하지.”

“……죽을래?”

“오늘은 더 조심할게.”

특수팀 팀장들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같은 조직에서 나고 자라 지겹도록 얼굴 본 사이에 둘 다 같은 마음 품어놓고 해가 될까 꼭꼭 숨겨뒀다. 그래서 진작 이어졌어야 했을 실이 질질 늘어나서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다. 엄마아빠랑 같은 루트 타면서 당연히 서로의 끝은 서로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내 연애의 희망 편. 빠지는 일 없이 일 중독으로 살면서도 하루의 시작과 마지막은 늘 함께 하곤 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해진 지금.

“이제노랑 같이 하는 거지?”

“응. 이번에도.”

“가면 갈수록 이상한 걸 들고 와.”

“나랑 하니까 괜찮지.”

“너랑 해서 괜찮은 거야.”

서로 옆에 다른 이름이 적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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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 0423: 네 사랑은 최소한의 숨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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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Francesca Jacobs Ret

Birthday: 1996-12-09

Address: Apt. 141 1406 Mitch Summit, New Teganshire, UT 82655-0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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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Technology Architect

Hobby: Snowboarding, Scouting, Foreign language learning, Dowsing, Baton twirling, Sculpting, Cabaret

Introduction: My name is Francesca Jacobs Ret, I am a innocent, super, beautiful, charming, lucky, gentle, clever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